아이들이 어릴적 강원도 빙어 낚시 체험을 간 적이 있다. 사슴벌레, 장수풍뎅이, 개미, 달팽이 등 온갖 곤충과 동물에 관심이 많았던 아들은 금새 빙어 낚시의 즐거움에 빠졌다. 한마리를 낚고 나서 신이 난 아들은 넘치는 자신감을 자랑했다. 하지만 금새 잡힐 것 같은 빙어는 쉽게 잡히지 않았고, 애가 탄 아들은 얼음 구멍 안을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말이다. 그 순간 찍은 사진을 그려보았다. 빙어에 대한 집념,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집중력의 순간이다.
사진을 볼 때마다 느낀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집중력을 갖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런 집중력의 경험은 삶에 있어서 큰 자산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집중력이 길러지지 않는다면 공간을 옮겨서라도 집중력의 경험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마크 트웨인의 소설, 『톰소여의 모험』에서 톰의 울타리 페인트 칠 사건(Tom and the Fence)을 기억해보자. 페인트 칠하기가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활동이 되는 순간, 그것은 더이상 따분하고 지루한 노동이 아니라, 즐거움과 몰입감을 주는 놀이가 된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가장 아끼는 물건을 흔쾌히 주면서까지 울타리 페인트칠에 동참하고 싶어한다. 톰의 친구들은 바로 몰입의 즐거움을 알아버렸던 것이다. 일이 더이상 노동이 아니라 놀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이지만, 놀이가 되기 위한 첫번째 조건은 몰입과 즐거움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어떤 일에 몰입하고 있다면 그 순간은 '나'만의 우주가 된다.
집중력에 대한 글 몇 개를 찾아보고자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미하이 칙센트 미하이의 『몰입의 즐거움』, 그리고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다. 두 저자의 관계를 모르고 그냥 읽었었는데, 서로 깊이 잘 아는 사이였고, 영향을 주고 받았다니 신기하면서도 매우 흥미로웠다. 『몰입의 즐거움』에서 칙센트 미하이는 어떤 일들이 몰입의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일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단순 반복적인 일이 아닌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 유익하고 의미가 있는 일 등이 몰입을 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직장에서 목수로 변신한 사람은 창조적 적응의 본보기로 꼽을 만하다. 그런 사람들은 최대한 몰입 경험을 할 수 있는 생산 활동이 나타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찾는다. (98)
몰입 경험이 가장 많은 세대는 조부모 세대였고, 대부분 일을 하는 동안에 겪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테면 목초지에서 풀을 베거나 헛간을 고치거나 빵을 굽거나 젖을 짜거나 정원을 가꾸거나 하는 활동이었다. 중년 세대는 일과 여가 활동에서 얻은 몰입의 경험의 비중이 엇비슷했다. 그들이 즐기는 여가 활동은 영화 관람, 바캉스, 독서, 스키 등이었다. (99)
유익한 대화, 정원 가꾸기, 책읽기, 병원에서 하는 자원봉사,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행위 등은 그보다 열배는 더 자원을 소모하는 활동에 절대로 뒤지지 않는 보람을 안겨준다. (102)
미하이 칙센트의 관점에서 몰입의 즐거움을 잘 누리는 소설의 주인공은 캐서린이다. 제인오스틴의 소설, 『노쌩거 사원』에서 캐서린은 소설 읽기를 즐겨하며 특히 고딕 소설에 대단한 몰입을 갖고 있는 여주인공이다. 소설 읽기는 즐거움과 흥미를 주고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게 만드니 바로 몰입을 가져다 주는 활동인 것이다.
소설 읽기의 취향은 그녀의 매력을 한층 더 높이게 만든다. 때로는 과몰입해서 지나친 상상을 하기도 하지만, 책의 독자로서 그녀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흥미로운지, 다음에 벌어질 사건을 집중해서 읽게 만드는 힘을 주기도 한다. 그녀의 세계관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데, 소설을 읽는 사람과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이다. 소설에 대한 몰입은 그녀가 만나게 될 사람들이 어떤 이들인지 자연스레 예측하게 해준다. 소설을 경시하는 소프 남매가 아닌, 소설을 읽고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헨리 틸니 남매들에게 캐서린이 점차 빠져드는 것은 당연하다.
『도둑맞은 집중력』의 저자 요한 하리는 sns기능을 할 수 없도록 핸드폰과 컴퓨터를 다 내려놓고 프로빈스타운에 가서 종이 신문을 읽으면서 지냈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숲에 가서 오두막을 짓고 농사지으면 살았던 『월든』의 저자 데이빗 소로를 떠올리게 한다. 처음에는 집중력을 방해하는 물건들을 차단하면 도둑맞은 집중력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사회 저변에 "집중력 문제를 유발하는 문화"가 깊숙히 깔려 있음을 인지한다. 문제는 스마트폰 자체가 아니라 스마트폰의 앱과 웹사이트가 설계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디자인 때문이다. 우리의 산만함은 그들(테크기업들)의 연료다.
현재 우리가 "집중력 문제를 유발하는 문화"를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물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집중력을 깊이 오래 유지하는 일이 모두에게 힘들어지며,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물살을 거슬러 헤엄쳐야 한다.(22)
알고리즘은 언제나 우리가 핸드폰을 내려놓지 않도록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을 정보를 파악해서 그 내용을 점점 화면에 들이붓는다. 알고리즘은 집중을 방해하도록 설계된다. 웹사이트들은 개인의 집중력뿐만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집중력까지 파괴한다. 오늘날 소셜미디어에서는 거짓 주장이 진실보다 훨씬 빨리 퍼져나가는데, 알고리즘이 분노를 유발하는 내용을 더 빠르고 멀리 퍼뜨리기 때문이다. 웹사이트들은 심각한 정치 양극화를 일으켜 한 집단으로서의 주의력을 빼앗아가는 기능을 없앨 수 있다.
알고리즘의 문제가 집단으로서의 집중력까지 파괴하기 때문에 분명히 이는 문제가 된다. 이런 문화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 정신을 차려야 된다는 생각이 든다. 집중력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쉽게 속임수에 휘말릴 수 있고 더 나아가 악의 세계로 빠지게 되지 않을까. 악을 마음 먹은 존재는 매우 강한 몰입과 집중력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메리 쉘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은 매우 집요하게 그의 창조주를 파괴하려 한다. 마음과 정신의 몰입도를 측정하는 기계가 있다면 괴몰의 집중력 수치는 극에 달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집중력"이란 가치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일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고 나의 의지에 기반을 둔 행위이기에 나를 내 삶의 '주인'이 되도록 해주는 것이다. 요한 하리가 프로빈스타운에 갔던 일이 오롯이 집중력을 회복시켜주지 못했다고 고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둑맞은 집중력을 찾기 위해 공간을 이동해 보는 것은 좋은 방법에 속한다. 데이빗 소로가 콩코드 숲에 가서 농사짓고 책읽고 글을 쓰면서 지냈던 일들은 분명 그의 집중력을 회복시켜 주었고 그 결과 우리는 『월든』이라는 우수한 문학작품의 혜택을 보고 있다. 『월든』을 읽으면서 몰입감을 얻고 있으니 이 과정을 일명, '몰입감의 알고리즘'이라고 칭하고 싶다.
제인오스틴의 소설 『맨스필드 파크』의 여주인공 패니는 부유한 이모 집에 살다가 가족이 살던 포츠머스에 잠시 다녀오게 된다. 가난한 고향집은 너무 누추하고 그녀가 편하게 쉴 공간도 제대로 없다. 하지만 맨스필드 파크의 이모집에서는 자신만의 2층 다락방이 있어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피로한 부분을 해소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기도 하면서 그녀에게 성장과 성숙을 이끈 공간이 된다. 집중력 회복을 위해, 삶의 주체성을 회복하게 위해 그녀에게 그 공간은 반드시 필요했다. 패니가 다시 맨스필드 파크의 이모집에 가야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집중력을 찾기 위해 가끔씩 나는 그림을 찾아서 본다. 그 중에서 오늘 찾은 그림은 장 바티스트 시메옹의 <식사전 기도>라는 그림이다. 내가 그림으로 공간을 옮기고, 그림을 읽으면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 그것은 나에게 깊은 몰입감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