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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지점들

by 제이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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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 아들과 큰 딸의 입시 준비 시절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학원으로 가는 뒷모습, 이날 남편과 나는 양재천을 걷다가 아이들을 만나 같이 점심을 먹었고, 학원가는 아이들의 그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단풍이 곱게 물든 거리 풍경은 너무 아름다운데, 아이들의 마음속엔 입시의 중압감이 크게 자리하고 있어서 변화해가는 자연의 모습을 둘러 볼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가끔 이 사진을 보여주곤 하는데, 그 이유는 힘들었던 시절의 순간도 각자의 삶에 밑거름이 되어 현재의 탄탄한 기반이 되고 있음을 알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각자의 삶에는 무수히 많은 시간의 지점들(spots of time)이 있다. 기억으로 떠올리는 수많은 경험의 순간들 말이다. 시간의 지점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서곡(Prelude)>이라는 시에서였다. 영문학 공부하던 대학원 시절이었으니, 20년도 더 됐다. 그에 따르면, 시간의 지점들은 "독특한 탁월함으로 활력을 불어넣는 힘"을 지니고 있고, "그릇된 견해와 논쟁적인 사상, 사소한 일들과 되풀이되는 일상사 안에서, 혹은 무겁거나 훨씬 가중된 중압감에 의해 낙심"할 때 우리는 그것으로 "자양분을 얻고" 서서히 회복된다는 것이다. 또한 시간의 지점들은 "기쁨을 고취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높은 곳에 있을 떄는 더 높이 오르게 해주고, 절망하고 낙심할 때는 쓰러진 우리를 일으켜 세워 준다고 한다.


There are in our existence spots of time,

That with distinct pre-eminence retain

A renovatiing virtue, whence, depressed

By false opinion and contentious thought,

Or aught of heavier or more deadly weight,

in trivial occupations, and the round

Of ordinary intercourse, our minds

Are nourished and invisibly repaired;

A virtue, by which pleasure is enhanced,

That penetrates, enables us to mount,

When high, more high, and lifts up when fallen.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지점들이 있으니,

그것들은 독특한 탁월함으로

활력을 불어넣는 힘을 지니고 있어

그릇된 견해와 논쟁적인 사상

사소한 일들과 되풀이되는 일상사 안에서

혹은 보다 무겁거나 훨씬 가중된 중압감에 의해

낙심할 때

우리의 마음은 그것들로부터 자양분을 얻고

은연중에 회복된다네.

기쁨을 고취시키는 힘은

우리 안에 스며들어

높은 곳에 있을 땐 더 높이 오르게 하고,

쓰러질 땐 일으켜 세운다네.

<Prelude 12, 208-218>


"시간의 지점들"의 의미와 그것이 주는 힘은 이 시를 배운 이후로 내 삶에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여유로운 휴일에 햇살을 맞으며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내 삶의 "시간의 지점들"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잠들지 못하는 밤에 창가에 부는 바람 소리에 귀기울이며 가만히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어떤 기억들은 그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는데, 특정한 그날의 경험에 맞물려서 새롭게 떠올랐으며, 그 기억이 주는 기쁨과 힘이 너무 커서 수첩에 메모해 보기도 하고, 나중에 또 다시 그 기억을 떠올려보기 위해 기억 속에 각인하는 연습을 해 보기도 했다. 내 삶의 "시간의 지점들"은 내가 목표한 어떤 것을 도달했을 때는 더 노력해서 또 다른 성취를 하도록 해주었고, 실패와 좌절의 순간에는 절망 속에 함몰되지 않고 일어날 수 있도록 작은 힘을 불어넣어 주곤 했다. "시간의 지점들"을 떠올려보는 것이 나에게 또 다른 즐거움이 되기도 했다.


알다시피, 시간의 지점들을 떠올릴 때, 우리는 순차적으로 기억들을 끄집어내지는 않는다. 과거의 경험들은 현재 '나'의 감정과 경험 안에서 서로 다른 순서로 소환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경험은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이러한 삶의 재구성으로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꿈꾸기도 한다. 누군가는 시를 쓰면서, 소설을 쓰면서 자신의 삶의 재구성해 가기도 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 혁명을 경험했던 워즈워스는 시를 쓰면서 개인의 삶과 역사를 재구성해 보았고, 이런 과정에서 시를 쓰는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가기도 했다. 제인오스틴 또한 마찬가지다. 결혼의 실패, 여성으로서의 삶에 일어났던 다양한 경험들이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그녀 만의 독특한 소설을 쓸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녀는 소설을 쓰는 자신만의 독특한 자아를 구성해 냈던 것이다. 한편, 그림으로 시간의 지점들을 재구성해 가는 화가도 있다. 첫걸음을 뗀 아이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 밀레의 그림을 보고, 고흐는 같은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다. 밀레의 삶에 있어서 아이의 첫걸음의 순간은 너무도 기쁘고 아름다웠기에 그의 그림으로 재구성되었고, 밀레의 이 작품을 본 날 고흐는 매우 강렬한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밀레의 <첫걸음>을 감상한 날은 고흐에게 시간의 지점이 되어 고흐만의 색채와 붓터치로 그만의 <첫걸음>을 그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이 두 화가의 그림을 보면서 우리 아이들의 첫걸음이라는 시간의 지점들을 떠올려 보았고, 이는 나에게 활력과 기쁨을 불어넣어 주었다.


%EB%8B%A4%EC%9A%B4%EB%A1%9C%EB%93%9C_(4).jpg?type=w773 <밀레의 첫걸음>


?src=http%3A%2F%2Fblogfiles.naver.net%2F20140821_176%2Fkyoin99_1408587073309hkSMW_JPEG%2FVincent_van_Gogh_-_First_Steps.jpg&type=sc960_832 <고흐의 첫걸음>

오늘도 나는 <시간의 지점들>이라는 글을 쓰면서 또 다른 내 삶의 시간의 지점을 만들고 있다. 우리 삶은 권태롭고 무의미하게 보이는 "사소한 일들과 되풀이되는 일상사"일지도 모르지만, 시간의 지점들이 있어서 모래알처럼 흩어지지 않고 진흙처럼 뭉쳐진다. 이러한 지점들은 내 삶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재구성의 힘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나의 경험이 내일의 나에게 어떤 시간의 지점으로 다가올지 벌써 설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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