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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창범 Nov 13. 2018

<유빙의 숲>을 읽다

얼음숲에서의 따뜻한 커피 한 잔

이은선 작가는 소설집 <유빙의 숲>을 자신의 두 번째 '분나 마프라트'라고 했다. 귀한 손님에 대한 대접이고 갈등이나 분쟁의 해결을 위한 에티오피아의 커피 세리머니다. 생두에서 원두, 그리고 한 잔의 커피가 되어 사람의 입에 다가가는 의식. 그 의식의 속도를 사랑한다고 했다.


'카리오몬'이라 부르는 이 의식은 세 잔의 커피를 마시는 것에 굉장한 의미를 부여한다. 첫 번째는 너의 이야기를 듣는 아볼, 두 번째는 나의 이야기를 하는 후에레타냐, 세 번째는 서로가 조화와 평화를 맺는 베레카다. 소설에서 작가는 어떻게 '분나 마프라트'를 펼쳐 보일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작가에게 서평을 핑계로 책을 보내달라고 했다. 흔쾌하고 보내줬고 날을 잡아 하룻만에 다 읽어버렸다. 암튼 변변치 않은 서평을 써 본다.  

 



소설가는 아볼과 후에레타냐를 교묘하게 짜깁기하고 독자는 그 이야기의 구조들 사이로 헤집고 다니다가 길을 잃기도 하고 구원을 얻기도 한다.


소설집의 첫 번째를 여는 <유리주의>는 그냥 가볍게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들로 채워 넣었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인간군상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멀찍이서 혹은 아주 가까이 다가가 내면의 목소리까지 담아냈다. 그 가볍게 읽을거리였던 <유리주의>가 끝나자마자 나타난 <유빙의 숲>은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서로 다른 스토리가 의도를 짐작할 수도 없게 엉켜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유독 뇌리에 하나의 단어가 남는다. '기포'다. 세월호로 인해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죽어간 아이들의 마지막 숨결을 담아 방울방울 떠 올랐을 그 기포 말이다. 강요된 삶의 포기로 생겨난 기포들은 '희망'이 아니라 절절한 원망을 담고 있듯이 나머지 이어지는 <귤목橘木>과 <뼈바늘>은 아직도 남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세월호의 상처를 들쑤신다. 이 둘의 이야기에도 '액자'는 앞의 기포만큼이나 몸에서 뗄 수없게 붙어 다닌다. 이 액자는 다음에 이어지는 도주 연작에선 '엽전 꾸러미'로 바뀐다. 하지만 같은 의미다.


자가 가하는 고통이 있고 죽은 자가 주는 고통도 있다. 게다가 나 스스로 나에게 가하는 고통은 또 어떤가? 그러고 보니 <유리주의>에서 호텔 유리창에 부딪쳐 죽어간 새들의 고통이 다시 떠오른다. <유빙의 숲>에선 조카를 잃은 조형사의 고통이 있고 <귤목>에선 손주를 잃은 할아비의 고통이 있다. 성폭행 가해자와 피해자가 영혼결혼식으로 만나는, 죽어서도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인 <뼈바늘>까지 읽어내면 고통에 점차 무감각해져 감을 느낀다.

 

그런데 도주 연작의 첫 번째인 <귤橘, 화花>에 들어서면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으로 다시 뼈를 죄는 경험이 시작된다. 조선시대 위조화폐인 사주전을 만들던 남편이 죽고 가까스로 도망길을 겪어내는 한 아낙의 신고한 삶 이야기. 자신의 아들을 죽인 의원을 처단하는 묘사가 너무나 리얼해서 한번 더 읽어 본 <쇳물의 온도>에선 박상륭의 <열명길>을 읽었을 받았던 느낌이 되살아났다. 자신의 삶을 주도하지 못하고 왜 끝없이  '도주'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남긴 도주 연작의 마지막 부분 <파도의 온도>에 이르러선 '체념'이 <유빙의 숲>에서 등장하는 수백 년을 살고 죽어가던 상어와 흡사했다.


끝맺음을 하는 <커피 다비드>는 고통과 체념 사이로 방황하던 나를 다시 일상으로 돌려놓았다. 나도 좋아하는 커피 이야기와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앞의 무거운 서사들을 내려놓게 만드나 싶었다. 하지만 작가는 끝부분에 다시 '죽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작가는 분나 마프라트의 마지막 의식인  '베레카'로 조심스럽게 마무리한다.

  

나는 삿된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테이블을 다시 닦았다. 그러다 카페 안의 할로겐 등과 엘이디 전등을 모조리 켰다. 테이블마다 놓인 촛불의 심지에도 불을 붙였다. 어두운 하늘로 날아간 누군가가 이 빛을 보고 돌아올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목울대를 지그시 눌러 눈물을 참았다.

눈물이 섞인 침이 커피보다 썼다.


우리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던 '기포'를 더 이상 안 봐도 될 것인가? 아니다. 어디에선가는 또 생길 것이다. 아이들의 얼굴'액자'나 목숨 값인 엽전 꾸러미를 아무리 그러쥐고 달려도 눈물이 섞인 침을 삼키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간다. 잔혹한 현실에서도 우리는 희망을 붙들고 촛불을 다시 켜고 테이블을 닦는다. 삶이 아무리 우리를 속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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