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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들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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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리파토스 Nov 16. 2021

<쓰기의 말들>을 쓰다.

사회적 표정을 걷어낸 어른의 글쓰기


"자의식은 높고 자기 의견은 없는
사람이 됐다며
나답게 사는 법을 몰라 뒤척이는
글을 썼다.
사랑과 욕망의 시간을 불러내
사회적 표정에 눌린 감각 세포를 일깨우는 글을 썼다.

그러니까 어른에게 글쓰기는
사회적 표정을 조심스럽게 벗겨 내는 행위였다.
돈과 나를 맞바꾸는 거래가 본격화되기 이전의 '나'를 만나는 일,
자기의 사회적 표정과 대결하며 본래의 표정을 되찾는 일이
어른의 글쓰기 일지도 모르겠다."

은유, 쓰기의 말들. p.97


"문학은 슬픔의 축적이지,
즐거움의 축적은 아니거든요......
세상이 따뜻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면 시를 못 쓰게 되지요.
그건 보통 사람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니까요"

은유 <쓰기의 말들> 중 최승자 시인의 말 p.105


"슬픈 책을 읽고 슬픈 일을 꺼내 슬픈 글로 쓰면 슬픈 채로 산다.
살아갈 수 있다.
왜 슬픈 책을 읽느냐는 항의는,
나는 슬프다는 인정이고,
슬픈 사람은 할 말이 많게 마련이며,
거기서부터 글쓰기는 시작된다."

은유 <쓰기의 말들> p.107


작년 이맘때쯤 새벽 기상을 시작하면서

 새벽 일기를 썼다.

새벽 기상을 오래 했지만  

새벽 일기 쓰기는 처음이었다.

보통은 책을 읽거나

업무 스케줄을 정리했다.


하루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자는

의도에서 자발적으로 시작했지만,

한 달도 못하고 일기 쓰기를 그만두었다.


육아 스트레스와 사업에 대한 불안감으로

마음이 지쳐있던 때였고,

아무도 보지 않는 글이라  생각하니

감사의 말보다 우울, 불안, 짜증의

단어들만 나열하고 있는 거다.


감정의 해소는커녕

새벽부터 눈물바람으로

우중충하게 하루가 시작되었다.

몹쓸 짓이라 생각되어 일기 쓰기를

그만두었다.




쉰이 다 되도록 나는,

쓰고 싶다는 욕망을 뒤로하고

읽는 사람이었지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도

사회적 표정에 가려진 본연의 내 모습을

마주 할 자신이 없어서일 테지.


‘나는 슬픈 사람이고,

슬픈 사람은 할 말이 많아서’

가득 찬 슬픔이 펜을 통해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우울에 갇혀

질척거리는 삶이 싫었다.

엄마의 오랜 우울을 지켜보며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 다짐했었으니까.


그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질 곳 없이

써 내려지는 내 슬픔이

무용하다 생각되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사회적 표정으로 내 슬픔을

감추어야 했던 시간은.


매 맞는 엄마를 지켜주어야 했던

어린 시절 일까.


 동생들을 위해 '부모 대신'의

역할이 주어졌을 때부터일까.


아니면... 축복받지 못한 결혼을 하고,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을 때

부터였을까...


어쩌면,

요란했던 남편의 외도를 견디지 

못하고 이혼을 한 후부터일 수도 있겠다.

 

한 생명을 책임지는 엄마가 된 후로는

훨씬 더 두꺼운 사회적 표정으로

슬픔을 감추어야 했겠지.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부터

나의 어린 부모는 늘 내게 말했었다.


"아빠는 마흔 까지만 살 거야. 그러니 네가 동생들 잘 보살펴야 한다"


"너는 큰 딸이고 동생 셋을 위해 언제든

부모가 되어야 한다"


“동생들이 보고 있다.

넌 항상 모범이 되어야 해”


모범과는 거리가 멀었던 어린 부모는

가혹하게도 너무나 일찍 나에게

사회적 표정을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그랬나.

나는 태어날 때부터 강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살아왔다.

그럴 깜냥도 못 되는 주제에

'강한 척' 하며 살아남았다.


슬픔은 쓰는 것이 아닌

웃음 뒤로 흘려버리는 것이어야 했다.

슬퍼 보이는 사람은 곁에 두지 않았다.

우울이 표정에 드러낸 사람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혹여 그 감정의 불씨가 내게 튀어 올라

우울의 DNA가 발현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그토록 공허하게 취한  

웃었던 날들이 많았었나 보다.


나쁘지 않았다.

상처투성이 나를 드러내 보이는 것보다

취해서 실없이 웃는 편이 나았다.




헌데……

이상하게도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만 쓰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그 욕망의 실체가 어쩌면 '슬픔'이라는 감정일 수도 있겠다.

내 안에 더 이상 담겨 있을 수 없는 슬픔이

삐죽삐죽 글로 새어 나오려는 것인가.

 


지난 한 달 동안 나를 들여다보는

글쓰기를 했다.

단순히 감정만 쓰지 않고 살아온 기억을

끄집어내어

타인의 삶을 기록하듯 썼다.  


아주 어릴 때 이야기도 썼고,

사춘기 때 이야기도 썼고,

부모님 이야기도 썼고,

현재 내 마음에 대해서도 썼고,

아이에 대한 글도 썼다.


최대한 우울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담담하게 쓰려고 했다.

받아들여질 곳 없는

무용한 슬픔들이 증발되도록

건조해진 시간을 마구 써 내려갔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마음 근육이 세월에 단단해진 건지

예전만큼 내 얘기를 쓰는 것이

아프지 않았고,

꾸역꾸역 밀려 나오는 슬픔도

가볍게 길어 올려 담담하게 사실만

써 내려갔다.


담담하게 건조한 문체로 쓰면 쓸수록

내면의 수증기가

몽글몽글 눈가로 흘러나오며

정서적 허기가 채워졌다.



자꾸 뒷덜미를 부여잡는

현실의 문제들이

영혼의 독소들을 불러 모으려 할 때마다 글을 썼다.

외면했던 어릴 적 내면 아이와 자주 만나려고 노력했다.


한 달을 꼬박 쓰는 사람으로 살았다.

더러는 감추고 더러는 글 쓰는 동기들과

 나누었다.

감추는 이야기보다 드러낸 이야기가

나를 홀가분하게 해 주었다.

신묘한 경험이었다.


그저 ,

썼을 뿐인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누군가를 향해 쏟아지던 원망의 말들이

잦아들었다.

남편을 향한 이유 없는 적의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아이에게도 자주 내 감정의 상태를

솔직하게 말한다.


그 감정의 원인이

걱정인지, 불안인지, 미안함 인지

나에게 자꾸 물어본다.


"화"를 내는 것이 아닌,

내 마음을 잘 말하는 엄마가 되고 싶어서.



내면을 들여다 보고

나에 대한 글을 쓴다는 일이

이렇게 까지 편안함을 주리라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다.


물론 아직도 보여주는 글쓰기가 낯선 나는 꾸역꾸역 글을 쟁여둔다.

묵은 감정들이 휘발된

담담한 글을 쓰고 싶어서.


그 담담함이

소용돌이치는 거친 언어들보다

더 큰 울림을 주게 되는 글을 쓰고 싶어서.


쓰고 쓰다 보면 슬픔도 차고 넘쳐흐르고

 비워진 그 자리에

새로운 무언가가 채워지겠지

바라면서.


어쩌면 이제는

사회적 표정을 벗겨내어

본래의 표정을 되찾으며,

어른의 글쓰기가 시작되는 게 아닐까.

비로소 내 안의 묵은 감정들을 비워내는

치유의 글쓰기 말이다.




벌거벗은 자신을 쓰라.
추방된 상태의,
피투성이인.

 -데니스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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