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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창 Sep 22. 2023

The Wind

Keith Jarrett, [Paris Concert]




  거친 소리를 내는 연주자를 좋아하지 않는 건 오래된 취향이다. 자신의 악기에서 좋은 소리를 끌어내기 위해 오랜 시간을 인내하며 반복하고 또 반복해 온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이 있다. 예민하기 끝이 없는 귀와 섬세한 손가락, 그리고 안정된 호흡과 자세가 힘을 합쳐 악기에 숨겨져 있던 소리를 찾아내어 세상에 꺼내는 행위에 경의를 표한다고 할까. 심장이 지금보다 훨씬 빠르게 뛰던 어린 시절에도 거친 롹 음악에 그다지 반응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같은 맥락일 것이다. 오히려 삼십 대가 되어 내 안에 넘쳐나던 에너지가 조금씩 빠져나가는 걸 느낄 때쯤 '아, 젊음이란 게 이런 거였지' 하면서 롹음악을 조금 더 잘 받아들이게 되었다. 조금 아이러니하긴 해도.


  그러니 재즈를 탐닉하면서도 블루노트의 무수한 연주자들보다 키쓰 자렛을 들었던 것이다. 


  내게는 파리 콘서트가 그 유명한 쾰른 콘서트보다 먼저 다가왔었다. 그의 솔로 콘서트가 대체로 그렇듯, 장황하기까지 한 의식의 흐름이 한참 이어진다. 그에 따르는 아름다운 선율과 그에 걸맞은 섬세한 터치를 듣는다. 그렇게 무한한 느낌이 들 정도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걸 지켜보는 건 놀라운 경험이다. 하지만 십여 분이고 그의 소리에 끌려가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그는 나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구나 싶은 생각이 떠오른다. 너무도 훌륭한 그를 지켜보는 내가 조금 서글프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그는 어떤 모티브를 끝없이 반복하기 시작한다. 피아노에서 거대한 소리를 끌어내고 있다. 그의 작은 체구가 눈앞에 그려진다. 이미 피아노 벤치에서 일어나 엉거주춤한 상태로 연주를 한지도 한참이 지났을 것이다. 걷어붙인 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뚝에는 오랜 시간의 연습과 연주가 새겨낸 단단한 근육과 힘줄이 보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새 릴리즈, 격정을 내려놓고는 음악을 마무리한다. 


  그 뒤에는 짧고 명확한 곡을 앙코르로 연주한다. 파리에서의 그는 <The Wind>를 선택했다. <바람>이라는 무척이나 단순 명료한 제목이다. 러스 프리만의 곡이라는데, 그에 대해서는 쳇 베이커의 피아니스트였다는 사실과 이 곡의 작곡자라는 두 가지의 단편적인 사실만 기억하고 있다. 어쨌건 키쓰 자렛은 바람을 노래하기 시작한다. 바람소리라고 생각하고 들으면 그의 연주에서 어느새 휘이이잉,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숨을 좀 죽이라구, 저 바람소리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들어내려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하루키의 첫 소설을 생각한다. 늦은 밤, 재즈 클럽을 운영하는 고된 노동을 마치고 돌아와 식탁을 마주하고 새벽까지 글을 써 내려가던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그의 옆모습이다. 제법 집중한 탓에 미간에 힘이 들어가 있고 눈매가 당겨져 약간 날카로운 듯 보인다. 왼손으로 이마를 받치고는 오른손의 만년필로 헝클어진 생각을 무작정 받아 적는 중이다. 이제 막 글을 쓰기 시작한 젊음이니 식탁 위의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몇 개고 수북이 쌓여있다. 잠옷 대신 입는 목이 축 늘어진 반팔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보니 늦여름에서 초가을 정도가 아닐까. 


  그렇게 하루키는 바람의 노래를 들으라고 써 내려갔고, 한참 뒤의 키쓰 자렛은 바람을 노래했다. 광적인 재즈팬인 하루키가 키쓰 자렛을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 둘이 각자 젊음의 어느 한 시점에 바람의 노래를 들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키쓰 자렛이 부르는 바람의 노래, 숨을 죽이고 들으면 바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Provided to YouTube by Universal Music Gr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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