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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zzyhyun Feb 09. 2023

파란창고에서 재즈 듣기-42마디

쉼표 -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photo by @ddanddarawon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보이지 않는 것 하나.



 새로운 앨범의 녹음을 마치고 후반 작업도 거의 끝나가는 중이다. 이제 음원과 저작권 등록 등 실제의 음악과는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무적인 일들만 남았고, 벌써 세 번째 겪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매번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라는 생각에 다소 샐쭉해지는 표정이 잦다.


 어쨌든 나의 음악을 들어줄 극소수의 사람들은 이 과정에 대해 알 리가 없거나, 알아도 관심이 없을 테다. 당연한 이야기다. 누가 음악을 들으며 사무적인 과정에 대해 궁금해하겠는가. 나는 지금도 여기저기서 오는 CD 프레싱과 앨범 커버 디자인에 대한 연락을 받는 중이지만, 이런 일들은 모두 감상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일이다. 그나마 이번에는 음반 유통 대신 음원 유통만하고, 찍어낸 CD는 지인과 동료들에게만 선물로 드릴 예정이라 그 과정에서 겪어야 할 귀찮고 재미없는 일이 하나 줄은셈이다. 만약 음반과 음원 유통을 동시에 해야 했다면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뿐인가. 앨범을 내기 전부터 리허설을 할 연습실을 알아보고, 예약을 하고 예산이 어떻게 소진되고 있는지 끊임없이 체크하고, 녹음실은 어디로 정할것인지, 그날 세션분들에게 어떤 식사를 대접해 드릴지, 녹음실 도착 전의 동선을 고려해 녹음 시작 시간을 몇 시로 할 것인지 등등 무수한 계산과 추측으로 고장난 기계처럼 파열음을 내는 두뇌를 억지로 굴려왔다. 가끔은, 내가 음악에 대해 고민한 시간이 많을까 실무적인 것에 대해 고민한 시간이 많을까 궁금해진다.


 옛날의 음악가들은 이런 일을 할 필요가 없었을까. 상상해 본다. 만약 슈베르트가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냈다면 어땠을까. 인고의 세월을 거쳐 숭고미와 조형미를 두루 갖춘 작품을 만들어낸 슈베르트는 당연히 음원과 음반 유통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을것이다. 저작권 등록이나 인세에 관해 계약사나 소속사와 협의할 필요도 없었을 테고. 그러나, 당시의 음악가들은 오로지 라이브 연주만이 음악을 들려줄 수 있을 유일한 기회였을 테니 분명 신곡을 훌륭히 연주해 줄 오케스트라나 연주자들을 섭외해야 했을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염두에 둔 공연장이나 성당 또는 교회에 연락을 해서 어느 날짜와 시간대에 자신의 신곡 발표가 가능한지 알아봤을 것이고, 후원해 준 귀족이나 왕족에게 연락을 해 친히 그 시간대에 오실 수 있는지, 혹시 안되신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일일이 물어봐 조정해야 했을 터. 슈베르트가 원하는 날짜에 성당에서 공연히 불가능했다면 아마 담당 신부가 이렇게 답신을 했을 것이다. '친애하는 슈베르트 씨, 우선 저희의 성당에서 연주를 하고 싶다는 의사에 대해 몹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해주신 날짜에는 현재 다른 작곡가의 발표가 예약되어 있어 원하시는 대로 진행이 불가함을 말씀드립니다. 혹시 그 다음날이나 다다음날에는 안되실까요? 현재 이번달에 예약이 비어 있는 날은 그 이틀 뿐입니다. 그리고 사용료에 대해서는 저희가 따로 동봉한 봉투에 견적을 넣어드렸으니 보시고 편하게 의견 주시면 조율 가능합니다. 그리고 발표회 이후 따로 연회나 식사도 진행하실지 알고 싶습니다. 답신 기다리겠습니다.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게다가 당시에는 프린터가 없었으므로 오케스트라에게 나눠줄 악보도 전부 일일이 손으로 그렸을 것이고, 사람이다 보니 급하게 악보를 그릴 때 음표 하나 정도는 잘못 기보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리허설 도중 분명 어딘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날 테고, 잔뜩 성이 난 슈베르트는 연주자를 질책하다가 악보가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크게 좌절하며 모든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악보를 일일이 재점검하기에 이르렀을 수도 있겠다. 숨 막히지 않는가. 옛날이나 오늘이나 연주자, 작곡자가 짊어진 짐은 비슷했을 것이다.


 그러니 음악이 별로여도 그 사람을 너무 질책하지는 말아달라는 옹색한 변명을 하고 싶었다. 행여 그 사람의 음악을 다시 듣는 일이 없더라도, 그 별로인 음악은 사실 음악가가 감당해야만 했던 영수증과 정산과 스케줄 조정과 발걸음과 메뉴 고민 없이는 탄생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므로, 곡의 끝에 가서는 ‘그래, 그래도 고생했네’, 라는 말 한마디 해주는 따스함을 베풀어주지 않겠는가, 듣는 이여.





보이지 않는 것 둘.



 지난 두 장의 앨범을 돌아보며 늘 반성했던 것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작곡이고 하나는 연주였다. 그러니 쉽게 말하자면, 나는 곡도 별로, 연주도 별로였다는 얘기다. 더 직접적으로 얘기하자면 나는 그냥 다 별로였다. 그래서 이번 앨범에서는 꼭 뭐라도 좀나아진 모습을 기록하고 싶었다. 다소 뻔한 이야기일수는 있지만, 내가 듣고 반성했던 것은 브래드 멜다우의 연주였다. 타건에 있어서 그의 일관성, 리듬의 단호함, 명쾌한 논리성 등등. 우습지만, 그때의 나는 ‘그래, 이런 느낌이구나. 어느 정도 감을 잡은 것같은데’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스스로의 연주를 컴퓨터로 녹음해 보면서 그래, 실제 녹음 때는 이렇게 치면 되겠다, 라고 짐작해놓았다. 그게 얼마나 대책 없고 감 없는 짓이었는지를 나는 녹음 파일을 받아 들고서야 절감했다. 나는 아니었다. 여전히.


 그러나 뭐가 아닌지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저 사람은 괜찮고 나는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지만, 그래서 어떤 부분이 어떻게 별로인데? 라는 질문에 수학적인 답을 내놓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나는 볼륨 조절에 있어 약 25% 정도 더 일관적이어야 해, 라든가, 나는 언제나 곡이 60% 정도 진행될 즈음 약 15% 정도 템포가 빨라지는 경향이 있어, 라는 식의 답은 불가능한 것이다. 암담하게도 나는 훌륭한 연주자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느끼고만 있다. 있다는 것은 알지만 볼 수는 없는 벽.


 그건 내가 계산하는 스타일의 사람이 아니어서(혹은 되는 것이 두려워서) 일 수도 있다. 짧은 경험이지만, 내가 느낀 바에 의하면 뮤지션들은 훌륭한 연주를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사람과, 계산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분석하는 사람 두 가지 타입으로 나뉘는것 같다.


 훌륭한 연주를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사람은 음악 속에서 들리는 솜씨를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끼고 체득한다. 그게 극단적으로 발휘된다면 사람들이 말하는 재능이겠지만, 여하튼 그런 이들은 훌륭한 음악을 듣고 다시 자신의 것으로 풀어낸다. 이들이 카피하지 않거나분석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그들은 하나의 신비를 완전히 발가벗겨서 구석구석을 훑어보고 잘라서 뼈대를 확인한 다음에 더 이상 속으로 파고 들어갈 수 없을 때까지 돋보기를 들이대는 일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하면 신비가 파괴된다는것처럼 말이다.


 반면 계산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뮤지션들은 남의 연주를 철저하게 파고들어 해체하고 자르고 붙인다. 스케일을 분석하고 리듬의 패턴을 분류하고 그것을 재조합해서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막대한 시간을 쏟아붓는다. 그래서 보통 이런 일의 경지에오른 사람들의 연주를 들으면 지적이라는 느낌을 종종 받게 된다.


 나는 굳이 나누자면 전자의 사례인 듯하다. 재능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 역시 너무나 모든 것을 밝은 인식 아래 두려는 것을 본능적으로 겁내는 종류의 사람이어서 훌륭한 연주자와 나 사이에 있는, 보이지 않는 벽에 대해 일일이 확인하려 하지 않는 게 아닐까 짐작해 보는 것뿐이다. 그저 꾸준히 연습하다 보면 지금보다는 나아지겠지, 언젠가는 조금이나마 좋아지겠지, 라고 믿은 채 하던 것을 계속하는 것이 전부다. 어라. 아닌가. 나아지려면 변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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