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재질

<신이 나를 만들 때 넣은 것>

by 제이비

내 MBTI의 첫 글자는 I다.

I가 혼자 시간을 보내며 에너지를 채우는 성향이라지만,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무섭다.


퇴사 후, 나는 더이상 새벽 6시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점심을 먹으면서 1시가 넘었는지 확인하지 않아도 되고, 햇살 좋은 날 창밖을 보며 탈출을 염원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 백지처럼 펼쳐진 하루 앞에서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안절부절한다.

나는 오랜 사회화 끝에 고장난 걸까.


그렇다고 누굴 만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누군가 카톡으로 말을 걸어오면 한숨이 나온다. 그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다. '제발 그냥 나를 내버려둬' 라는 마음으로 카톡창을 열고 '그래 맞아, 우리 언제 보지?' 라고 동조한다. 나에게 먼저 연락을 건네준 그 마음이 고맙기도 하다. 그렇지만...


'혼자는 외롭고,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아'

신이 나를 만들때 무언가 레시피를 혼동한게 아닐까?


어쩔 수 없다. 나는 이상한 재질로 만들어졌음을 인정하기로 한다.

인정한 다음엔 무엇을 해야 할까? 노력해야지. 미래의 내가 지금보다 나은 모습이도록


노력: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애를 씀.




<노력 1>

하루의 일정을 정해둔다. 아니, 정하려고 노력한다. (아직 연습중이므로)

시간도, 요일도, 날씨도 나에게 어떤 제약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몸을 가만히 두면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들이 하나로 뭉쳐져 큰 돌덩이가 된다. 돌덩이는 나를 안고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간다. 심해에서 몇 번 허우적거려본 나는 하루 일정을 만든다. 돌덩이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그렇다고 시간단위로 철저히 나를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머릿속에 다음 할 일을 떠올리고 몸을 움직인다. 12시에 잠들고 8시에 일어나려고 노력하고, 아침을 간단히 먹고 조금 쉰다.(휴대폰 게임을 하거나 유툽을 본다) 해야 할 집안일을 마친 후 책상위에 앉는다. 이 때가 가장 힘들다. 손은 키보드 위에 있는데, 집중력은 책상 아래로 도망친다. 남은 건 무기력. 나는 버려진 빈집처럼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마음이 힘들 땐 몸을 써야 한다. 알지만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다. 힘들다는 마음을 딛고 운동복을 입기까지 감정이 오르락 내리락 한다.


집중이 안되고, 운동도 하기 싫을 때, <노력 2>를 추가한다


<노력 2>

아침을 먹고 내가 좋아하는 카페로 간다. 카페는 집에서 차로 20분 거리. 이 곳은 숲 속에 위치한 대형카페인데 평일에는 사람이 많지 않고 테이블 간격도 넓어서 혼자 작업하기에 좋다. 무엇보다 사방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햇볕과 초록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나는 햇볕과 초록을 좋아한다.


<노력 3 - 찾는 중>

몸이 무거워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는 날, 글자를 보는 것도 귀찮은 날이 있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우울이 찾아온다. 휴대폰만 들여다보며 멍해 있다가, 문득 거실에 아무렇게나 놓인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우울이 찾아오는 건 여전히 무섭지만, 아주 조금은 익숙해졌다. 나는 시집을 꺼내 큰 소리로 읽는다. 내 우울에게 들으라는 듯이.


그러다 어떤 문장을 만나면,


우울이 우물이 되고, 컴컴했던 우물이, 달빛 한 점으로 환해진다는 걸 알게 된다.


나는 이상한 재질로 만들어진 사람이여서, 시를 놓을 수 없다.

시는 이토록 이상한 것이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