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타인의 거리
삼일째였다. 삼일 동안이나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내가 전하고 싶은 것은 고작 한 문장, 하나의 의미. 하지만 나의 의도가 그에게 가닿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내 머리 속의 생각이 나의 입을 거쳐 파장을 지닌 음성으로 변태變態하는 동안 무수한 의미의 탈락이 반복되었고, 수많은 의미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붙었다. 말을 하면서도, 그게 아니라는 생각은 멈추질 않았다. 탈락한 의미들을 보완하기 위해, 의미에 새로운 언어를 계속해서 입혔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주사를 가진 취객 같았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절실했다. 나의 마음이 가닿기를. 하지만 말은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살을 붙였다. 내가 뱉은 말속에 나의 진짜 의도는 얼마나 포함되었을까. 나와 마주 앉은 아리송한 표정. 그의 표정으로는 읽기가 어려웠다.
그 얘기였니? 어제는 전혀 다른 말인 줄 알았어.
하루 동안 쏟아낸 나의 모든 말이 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만들어 놓았음을 알았을 때. 내가 만든 말의 성이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바로 앞에서 목도했을 때. 허무함. 이 단어로 그때의 감정을 다 담아낼 수 있을까.
네가 말하는 A가 나에게는 이런 뜻이야.
나의 단어와 너의 단어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사랑, 우정, 함께, 가치, 공동체 … 이런 형태가 없는 것에서부터 아주 구체적인 모양을 지닌 것까지, 우리가 사용하는 거의 대부분의 단어는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어떤 때는 아주 사소한 뉘앙스의 차이에 불과했지만, 어떤 때는 의미 전체가 흔들리기는 거대한 차이가 생기기도 했다. 나의 말이 전혀 다른 의미로 가닿을 수 있음을 느낀 그다음 날, 나는 더 구구절절하게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내가 말하는 A의 의미는 말이야, 하며 단어의 의미부터 나열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날,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그래도 속이 좀 편하다며 웃었다. 정말 소통이 되었느냐고? 글쎄.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 나는 완벽한 소통을 믿지 않기로 했다. 다음번, 같은 이야기를 꺼낼 때 또다시 이야기하겠지, '그게 그 얘기였니?' 하고. 나도 잘 모르는 나의 진심에 네가 닿기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내가 부릴 수 있는 가장 큰 욕심이 아닐까. 우리가 서로의 언어를 완벽히 해독할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는 것이 나의 정신건강에도 좋을 것 같았다. 대신 나에게 남은 것은, 우리가 노력했던 그 삼일의 시간. 서로를 향하는 그 노력 자체로 나는 위로받았다. 이제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펼쳐놓는 의미의 바다에서 서로를 향하는 허우적거림, 그 서툰 몸짓이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위로받으며 끝없이 앞으로 나아간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하고. 그래서 다음번 네가 다시 나의 말의 의미를 물어준다면 그것으로 나는 기쁘지 않을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