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트네스의 Pay What you Feel Cafe를 가다
무지개로
여는 아침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서니 무지개가 우리를 반긴다. 이쪽 땅에서 저쪽 땅까지 짙게 드리운 무지개. 이렇게 가까이서 무지개를 본 적이 과연 얼마만인지! 울창한 나무가 드리워진 이국적인 풍경에 무지개까지 더하니 가히 장관이 따로 없다. 분무기를 뿌리는 것처럼 공기 속에 물기가 가득한 탓에 애써 단장한 머리가 다 젖어가는데도 기분이 좋다. 물방울과 빛의 만남으로 생긴 단순한 자연현상인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신의 계시까지 운운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 순간을 놓칠 수 없다며 카메라와 휴대폰을 총동원해 사진을 찍어댔다. 모처럼 한국의 가족들에게도 안부를 전하며 사진 전송. 그들에게도 무지개가 기분 좋은 소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길을 따라 내려가니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토트네스 시내 한가운데 있는 성 마리아 교회 Church of Saint Mary에서 울리는 소리다. 토요일엔 교회에서 종을 울리는 걸까. 단순한 알람이라기엔 화려하다 했는데, 교회 주변으로 사람들이 쭉 둘러섰다. 사제복을 입은 주교가 교회 안으로 들어가고 화려한 옷차림의 하객들이 줄이어 등장하는 걸 보아하니 결혼식이 열리는 모양이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고 결혼 풍경이 아름답지 않을 수 있을까. 누군가의 가장 행복한 순간에 참여한다는 것은 더없는 행운이었다. 1450년에 지어졌다는 오래된 교회, 핑크색 드레스로 맞춰 입은 들러리들, 꼬리가 길게 빠진 턱시도를 차려입은 신랑, 클래식한 하얀 승용차에서 내리는 아름다운 신부. 한 편의 동화를 훔쳐보는 것처럼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신부가 교회 안으로 들어가면서 관람은 강제 종료되었지만 입꼬리는 채 내려가질 못했다. 하루의 시작이 좋았다.
Pay What
You Feel?
운이 좋게도 토트네스에 있는 동안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주말에 여러 행사가 몰려 있어서 토요일은 그야말로 대목이었다. 자신의 집이 얼마나 친환경적으로 지어졌는지 사람들을 초대해 소개하는 '오픈 에코 홈 Open Eco Home', 토트네스 구석구석을 다니며 토트네스의 전환마을 운동에 대해 배우는 '트랜지션 워크 Transition Walk', 그리고 토트네스 내에 음식에 대해 고민하는 주민들이 여는 점심 밥상, '페이 왓 유 필필 카페 Pay What You Feel Cafe'까지! 어느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행사라 욕심을 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다녀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다. 토트네스의 여러 행사들로 하루가 꽉 찼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우선 끼니를 해야 했다. 전날까지 페이 왓 유 필 행사도 가자며 입을 맞춰 놓고는 어느새 까맣게 잊고 식당을 찾던 차였다. 시내를 따라 내려가니 페이 왓 유 필 행사에 참여해보라며 전단을 권했다. 교회의 한 공간을 빌려 차려진 소박한 식당. 연둣빛의 앞치마를 맞춰 입은 스텝들이 곳곳에 서서 다가올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들 아는 사람인데 우리만 외지인인 것 같아 괜히 쭈뼛거리고 있으니 함박 미소로 맞아주었다. 여행객이 받을 수 없는 낯선 환대에 약간은 얼떨떨한 기분. 그들의 환대에 나도 반응하고 싶은데 영어가 짧아 수많은 말이 목구멍을 채 넘어오지 못한 채로 머물러 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로 응대하며, 영원의 입을 빌려 간단하게 소개를 나눴다.
요금은 선불. 음식을 담기 전 우리가 지불하고 싶은 만큼 돈을 내려놓으면 된다. 누구도 눈치 주지 않는 결제 시스템에 잠깐 나쁜 마음도 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식사값을 내려놓았다. 얼마가 적당할지 고민하다가 토트네스에서 먹었던 평균 밥값 정도로 계산해 12파운드를 냈다. 뷔페식으로 차려진 식사. 익숙한 재료들이 낯선 자태로 쭈욱 놓였다. 흐물흐물 까맣게 풀어진 버섯과 알록달록한 빛깔의 비트와 당근, 오이와 건과일을 곁들여 만든 샐러드까지. 어떻게 만든 거지, 도대체 레시피를 알 수 없는 모습에 약간의 호기심과 또 아주 약간의 두려움이 생겼다. 만들어진 요리는 전부 유기농 채식에 글루텐 프리란다. 맛은 둘째 치고서라도 더없이 건강한 밥상을 받으니 괜히 경건한 마음까지 든다. 남기지 않고 먹어야지. 다행히 맛도 나쁘지 않았다. 새콤하고 쌉싸름한 채소들이 적당히 미각을 자극했고, 빵과 수프로 포만감까지 해결했다.
이어지는 디저트 타임. 달다구리는 전 세계 어디서나 옳은 법. 하나만 고르기가 어려워 무척이나 오래 망설인 끝에 귀여운 꼬마가 건네는 블루베리 비건 케이크와 먹음직스러운 애플 크럼블을 집었다. 애플 크럼블에는 해비 크림까지 듬뿍 얹었다. 이미 진한 치즈맛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비건 케이크는 역시나 너무 심심한 맛. 하지만 애플 크럼블은 영원이 영국 여행 중 최고의 맛으로 꼽을 정도로 훌륭했다. (비건 베이커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걸까.)
지구와 이웃을
돌보는 한 그릇
페이 왓 유 필 행사의 특별함은 그 이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바로 내가 내고 싶은 만큼 식사비를 지불하는 식당인 것. 물론 상설 레스토랑은 아니지만 값에 대한 권한을 온전히 소비자에게 맡긴다니 이처럼 위험한 발상이 어디 있을까. 상설 레스토랑이었다면 금세 문을 닫아야 할지 모르는 운영이 아닐까? 한 단체가 정기적으로 이런 행사를 열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자비심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페이 왓 유 필 행사가 근본적으로 가능한 이유는 바로 재료비에 있다. 바로 주변 농지에서 먹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상품가치는 떨어져 버려질 농작물을 저렴한 가격에 공수해 음식을 제공하는 것. 버려지는 쓰레기는 줄이고, 공동체에 좋은 먹거리를 각자가 지불할 수 있는 금액으로 제공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저렴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 접시를 뚝딱 해치우는 동안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더니 자리가 금방 꽉 찼다. 언제 시작됐는지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와 분위기를 돋웠다. 누군가 했더니 전날 밤 윌로우 레스토랑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시던 할아버지 피아니스트. 동네에서 알아주는 피아니스트가 틀림없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토트네스 문화를 배우고 싶어 왔다는 프랑스 수녀님, 세실과의 대화도 밥상에 곁들여졌다. 한국의 취업난부터 청년문제까지 넘나드는 이야기가 오가다 보니 대화가 한참 길어졌다. 세실 옆으로 앉은 동네 아주머니들도 우리에게 자연스레 인사를 건넸다. 마을 밥상의 힘이 이런 걸까. 대화를 나누며 밥을 먹으니 이 동네가 한 뼘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이토록 창의적인 밥상은 한 달에 한 번, 꽤나 자주 열리는 편이다. TTT(Transition Town Totnes)의 Food Community가 호스트다. Food Community에서는 이 행사를 두고 쓰레기 발생을 막고, 공동체를 돌보는 모임(Preventing waste, nourishing community)이라 소개한다. 질 좋은 먹거리를 이웃에 제공하고, 함께 먹는 밥상으로 마을에 흥을 돋울 뿐 아니라, 버려질 쓰레기를 구제해 지구 공동체를 비옥하게 하는 밥상. 누구나 부담 없이 와서 먹고 마시며 안부를 묻는 자리. 소비자가 아닌 친구로, 동료로 서로를 보는 만남. 도시에서도 이런 밥상이 과연 가능할까. 언젠가는 꼭 만들고 싶다면 과한 욕심일까.
적당히 낯선 생활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