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이 한 장에 담긴 일상의 문학 작품
안녕하셨지요?
지난 편지에서 이미 말씀드린 대로
뉴욕 출장이 겹쳐
지난번 편지는 전달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뉴욕 후속 편 이야기들을 기다리신 분들께서도
꽤 있으신 듯했습니다.
출장은 잘 다녀왔냐며
개인적으로
이메일을 보내주시기도 했습니다.
저는 빠듯한 일정 가운데서도
따스하게 전달해주신 정성어린 이메일로
더욱더 일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8년 만에 다시 밟아 보는 뉴욕’이라는
로맨틱한 상상을 기대했던 저는,
사실 준비 기간이랄 것도 없이
빠듯한 일정의 연속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기분을 전혀 느낄 수 없을 만큼
주어진 일에 충실해야했습니다.
자- 그럼 출장 중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해외여행을 가실 때
무엇이 가장 가슴을 설레게 하시는지요?
외국인과의 소통?
아님, 면세점?
쇼핑?
새로운 장소에서 맞이하는 아침?
아니면..
음식?
여러분들의 경험과 취미에 따라 다르겠지요.
저 같은 경우에는 비행기 안에서 읽는 책들이랍니다.
기내식을
우아(?)하게 마치고
실내조명이 꺼지면 많은 분들께서는 영화를 보시지요.
저는 주위가 어두워지는 그 분위기가 조성이 되면,
마치 제가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답니다.
무대 위의 혼자 등장하는
연극배우처럼 말이죠.
환한 핀 조명을 받으며
제가 마치 독자들을 위해
책을 읽어주는 것 같은
동화 속 주인공이 된답니다.
그래서 저는 평소에 잘 읽지 못하는
난해한 책들을 특히 많이 챙겨가곤 합니다.
많은 분들께서 지겨워하시는
블라디미르 나브코프의 <롤리타>도,
H. 멜빌의 <모비 딕>과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
그리고
<로드 짐>도 전부다 비행기 안에서 읽었답니다.
참, 구본형 선생님께서 추천해주셨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도
유럽 비행기 안에서 기를 쓰고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기에 비행기 안에서
책을 선택하는 것은
저에게 있어서 참 중요한 일입니다.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그 여행이 어떻게 기억되느냐가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가독성이 있는 책을 선택 할 것이냐,
아니면
평소에 잘 읽지 못하는 책을 고르느냐가
저에게는 여행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자-
그런데, 이번 뉴욕행 비행기 안에서는
아쉽게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책을 골라서 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즐기러 간 여행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출장'이었고,
대규모 투자자를 상대로 진행되는
영어 스피치가 예정되어있어서
이 내용을 달달달달- 외워야했기 때문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본인의 제품을 설명할 때 했던
그 정도의 자연스러움이 배어나도록
완전히 저의 것으로 만들어야했습니다.
출장을 떠나기
바로 하루 전에서야 비로소
내용을 간신히 만들 수 있었습니다.
장기간 자리를 비우기 때문에
이런저런 일들을 마무리해야했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러운 어법과 최신 용어들을 정리하고,
미국 현지에 있는 네이티브 스피커의 도움을 받아
지속적으로 내용을 수정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제 입과 몸에 맞는 내용이어야 했기에
저에게 조금 더 친숙한 단어들로 바꾸는데
전 시간을 다 써야했습니다.
비행기 안의 조명이 꺼지자
저는 눈을 감고 상상했습니다.
‘자- 이제 나는 무대 위의 진짜 주인공이다.
이 인생의 대본를 들고
200여명의 투자자들 앞에 서게 될
진짜 내 삶의 주인공이다.’
저는 단 한 권의 책을 들고 갔지만,
그것마저도
짐칸으로 보내 버리는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실제로 진행하게 될 회사 소개문
달랑 A4 4장짜리 원고만 들고 탑승했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중얼중얼,
커피를 마실 때도 중얼중얼,
문득 잠결에도 중얼중얼..
투자자들 앞에서
한마디도 못하고 쩔쩔매는 꿈을 꾸었다가
헐레벌떡 일어나서는 또 중얼중얼..
옆에 앉았던 여성분은
아마도 저를 이상하게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14시간을 지나 마침내 도착한 뉴욕...!
앗- 그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편지에서 해드릴께요!
참, 그리고 제가 선택한 단 한 권의 책,
그 책도 궁금하시죠?
그 책 이야기와 함께요.
자- 그럼 다음 편지에서 뵙겠습니다.
정재엽 드림. (j.chun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