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준생 시절에는 청계천의 야경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불 켜진 고층빌딩들이 그렇게 멋져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곳을 밤낮 없이 들락거리는 직장인이 되어서야 그 불 켜진 빌딩안에는 '사람의 눈'도 켜져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야근을 하고 회식을 하고 천근만근인 몸으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땡' 하고 정시퇴근할 수 있다면 그것은 2천만원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하고 되뇌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사이에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야근/회식 문화도 그 때와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작년부터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었고, 온 국민이 워라밸이라는 말을 다 알 정도로 하나의 캠페인이 되었으니 세상 참 좋아졌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기업 현장에 강의나 코칭을 하러 가보면 사회적 흐름과 실제 개인들이 체감하는 현실에 온도차가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분명히 일하는 시간은 예전 보다는 줄었는데, 이제 더이상 부어라 마셔라 하는 회식도 거의 없는데, "그래서 내 삶의 워라밸은 괜찮은가?"라고 자문을 해보면 쉽사리 "YES"라는 답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여전히 원하는 만큼은 쉬지 못하는 것 같고, 언제나 휴가도 부족한 것 같고, 휴가가 있어도 일이 너무 많으니 쓸 시간도 없고, 어쩌다 여유가 주어져도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할 지를 몰라서 그냥 허망하게 시간을 보내고. 그런 것이 많은 직장인들의 현실 입니다. 특히 워킹맘의 경우는, 육아를 병행하느라 완전한 퇴근이라는 게 없기 때문에 워라밸이 더욱 처참하지요.
잠깐, 그런데 워라밸이라는 게 의미하는 게 뭘까요? 워라밸이 '일과 삶의 균형'을 의미하니까 대략, 일하는 시간과 개인적으로 보내는 시간이 얼추 비슷한 것? 정도로 이해하고 계신가요? 그렇게 본다면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으로 주 168시간 중에 3분의 1 정도를 일하는 데 보내는 것이 되니 산술적으로는 벌써 '라이프'쪽에 무게가 많이 기울게 됩니다. 어라? 내가 느끼기엔 그렇지 않은데?! 난 행복하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은데?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Find your Why>의 저자로 유명한 '사이먼 사이넥'의 인터뷰를 보다가 저는 무릎을 쳤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과 생활의 균형은 구성원들이 일터에서 얼마나 안전하다고 느끼는가에 달려있다. '집에서 나는 안전하다. 하지만 회사에선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상태. 그것이 바로 워크앤 라이프의 불균형"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안전'은 신체적 안전 뿐만 아니라 정서적 안전을 포함 합니다. '회사에서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곧 '회사에서 나는 불안하다. 나는 편안하지 못하다'는 것과 같은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워라밸을 회사에서 몇 시간 일하는지 '양'으로 만 계산합니다. 하지만 실제 체감 되는 워라밸은 회사가 내게 주는 느낌이 어떠한지 즉, '질'에 달려 있습니다. 워라밸의 '양적 균형'도 어느 정도는 제도적으로 적정선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워라밸의 충분 조건이 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정해진 대로 군말 없이 일하는 AI나 기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날 상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오늘 한 일의 성과가 어땠는지에 따라 하루에도 수십번씩 기분이 왔다 갔다하고 코티졸 호르몬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살아있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사이먼 사이넥은 여기서 리더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직원들이 '나는 일하러 가는 것이 즐겁다'라고 느끼게 하는데 리더의 역할이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요즘 기업에서 리더분들을 코칭하는데 완전 열정에 불이 붙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구성원의 입장에서는 언제 바뀔지 모르는 상사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냥 저냥 '나쁘지 않다'(Not bad) 고 생각하는 수준이 아니라 정말 만족스런(Great) 워라밸을 갖기를 원한다면, 구성원 레벨에서도 자기 자신의 인생을 위해 고민해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퇴근하고 어떤 취미 생활을 할까?', '휴가를 어떻게 잘 보낼까?'의 영역을 넘어서서, 자신의 일이 더 만족스럽게 느껴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지 찾아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누군가는 그럭저럭 일하던 수준에서 좀 더 목표치와 실행력을 높여서 만족스런 성과를 내는 것이 워라밸을 당겨오는 힘이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동료나 상사와의 불편한 인간관계 문제를 개선하는 것이 해답이 될 수 있습니다. 혹은 좀 더 적성에 맞는 업무를 찾아보는 것, 완전히 다른 도전을 해보는 것, 모든 것을 잠시 쉬고 긴 휴가를 통해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것, 모든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워라밸을 일하는 시간(양)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몇 시간 일했는지', '휴가를 며칠 쓸 수 있는지'만 고려해서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온갖 감정과 욕구가 살아 움직이는 한 인간으로서, 내가 일에서 기분 좋은 느낌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워라밸의 '질'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직장인 시절의 제가 느꼈던, '칼퇴는 2천만원의 가치가 있다'는 생각은 물리적인 시간의 가치 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만족도를 포함한 것이었겠다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드네요. 이후에 직업을 바꾸고 10년이 흘렀으니 갑자기 2억을 저축했다는 생각이 번쩍!ㅎㅎㅎ 하지만 제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은 쌩뚱 맞게도 새벽 1시 40분..(칼퇴 없는 개인 사업자 워라밸 무엇ㅠㅠ)
언젠가 정말로 워라밸이 당신이 것이 될 수 있기를 깊은 밤 소망해봅니다. 일은 고통이 아니라, 보람이고 충만이어야 합니다.
일이 당신에게 즐거우려면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