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처음 소리친 날
2017년 2월 2일은 잊지 못할 날이다.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집이 떠나가라고 소리를 지른 날이기 때문이다. 집 한 구석에서 아직도 그 메아리가 울리는 듯하다. "너 진짜 그럴래! 엄마 정말 화났어!!! 엄마가 화 낼 줄 몰라서 참은 줄 알아! 알아!! 알아!! 알아!!!!!" 휴 다시 돌이켜봐도 심장이 떨린다. 문제는 그다음에 뭐라고 질러댔는지 기억도 안 난다는 것이다. 암튼 뭐 맺힌 사람처럼 뭔가가 끝없이 나왔다.
예전에도 큰 소리를 안 낸 건 아니었다. 난 목소리도 작지 않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내 목소리가 엄청 크고, 크게 내지르면 내가 들어도 무섭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스크림의 효과가 아주 확실하다는 것도. 셔틀 탈 시간이 되었는데도 밍기적거리던 아이가 스크림과 동시에 신발장으로 순간이동해왔다. "엄마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눈물 뚝뚝)"
내가 오늘을 유별나게 되새기는 이유는 내가 감정코칭 대화법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섯 살 된 꼬맹이의 행동이 앞으로도 내 기대와 바람을 철저히 많이 비껴갈 것으로 예상이 되어 미리 각오를 좀 하기 위해서다. 소리친 그 순간에는 머리 속에서 2016년 최고의 유행어 자막이 횡으로 지나갔다. '이러려고 대화 코치가 됐나 자괴감 들어...' 화를 분출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아이를 셔틀에 태워 보내기는 했지만 정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내가 수업에서 만나는 엄마들의 진짜 심정을 처음으로 내 마음처럼 이해하게 되었다.
오늘을 잘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으이구 말 안 들어 죽겠어'하고 아이를 원망하거나 '애한테 그렇게 화를 내다니 미친 거 아니야'하고 자책하는 두 가지 옵션 중 하나를 택하기 쉽다. 상황의 원인에 대해 나름 결론을 지었으니 더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이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둘 다 다음번 같은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한 해결책은 주지 못한다.
만일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나는 더 이상 이런 반성문 같은 걸 기록하지도 않을 것이고 아이 역시 내 말 한마디에 리모컨 센서처럼 반응할 일이 만무할 것이다. 나는 더 크게 소리치고 더 강한 위엄을 내보이고, 아이는 더 무뎌지고 더 강하게 반발할 것이다.
오늘 상황은 어제 아침의 그 아이를 ctrl+C, ctrl+V 한 것처럼 아이가 똑같은 행동을 하는데서 비롯되었다. 차 탈 시간이 되었는데도 내 말이 안들리는 것처럼 쉴드를 치고 거실에 앉아 장난감을 갖고 노는 것이었다. 셔틀이 밑에 와 있을텐데! 난 오늘 수업 때문에 데려다주지도 못하는데! 어쩌란거지? "시간 다 됐어. 친구들 기다려 어서 가자" 현관에 서서 어린이집 가방을 메고 초조하게 설득하던 나의 멘탈은, 아이가 보란듯이 레고통을 촤르르 쏟음과 동시에 촤르르 무너졌다. 10년 요가로 다리는 못 찢어도 복식호흡 하나는 강사보다 더 잘하는 나의 분노가 단전 밑에서 부터 끓어올라 터져나왔다.
아이를 보내놓고 나는 내 화의 원인과 내가 그 상황에서 바랬던 것, 아이가 최근 비슷한 행동을 반복하거나 전보다 강하게 하는 이유들을 생각해보았다. 죄책감 보다는 요즘 급격히 유아기의 어느 단계를 벗어나고 있는 이 아이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게 더 많이 느껴졌다. 하마터면 아무 의식 없이 '미운 다섯살'이라는 타이틀을 아이 목에 걸고 최근 잠시 화제가 되었던 '아들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은 엄마'를 자임할 뻔 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왔다. 하원 버스가 떠나고 한파의 거리에 남은 아이와 나는 참 어색했다.
"지안이 왔니"
"... 엄마 이제 풀려써?"
"(헐) 아침 일 기억하고 있었어?"
"응 나 다 생각하고 있어써"
"(헐) 지안이 보내고 엄마 너무 마음이 아프고 미안했어"
"나도 너무 죄송했어"
꼭 껴안은 아이와 나는 집에 와서 좀 더 얘기를 나눈 후 약속을 정했다. 아침에 좀 더 일찍 일어나서 아침 먹고 좀 더 놀다 갈 수 있게 하기로. 물론 절대 안 일어날 것이다.(문제는 나도 더 일찍 일어날 자신이 없다. 이거 쓰는 지금도 새벽 2시다) 하지만 전날에도 더 놀고 싶다고 늑장을 부리다 셔틀을 놓쳤었기에 '제발 엄마가 말하면 좀 들어' 하고 다그친다고 말을 들을 것 같지가 않았다. 되든 안되든 그런 행동을 유발하는 환경을 바꾸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 탓과 내 탓 사이에서 나는 환경을 일단 바꾸는 것을 선택했다.
어떤 이유에선지 사람들은 '엄마는 화를 내면 안 된다'고 믿게 되었다. 아이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결국 엄마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말이다. 나 역시 오늘 화를 낸 직후에는 그런 자책이 먼저 몰려왔다. 그러나 화는 사람이 느끼는 많은 감정 중에 하나이다. 희로애락 중에 어떤 감정 하나를 꼬집어서 "이제부터 절대 기뻐하지 마", "슬픔을 느끼면 안 돼!"이렇게 강제를 당한다고 생각해보자. 너무 이상한 일이다.
감정은 어떤 상황을 만났을 때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이다. 화도 마찬가지다. 너무 억누르면 쌩뚱맞은 상황에 갑자기 폭발할 수 있다. 오늘 내 고함이 스스로 놀랄 정도로 컸던 이유도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점점 드럽게 말 안 듣는 아이에게 차분히 얘기해온 나의 인내가 고갈된 것이다. 감정코칭 대화법은 화를 내지 않는 대화법이 아니라 화가 난 것에 대해서 서로 솔직하게, 더 진실하게 대화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휴. 절대 오늘 내가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내일 또 아이가 같은 행동을 보이면 어떡하지 하는 염려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일단 오늘 서로 한 약속에 대해서 '잘 지켜봐야지' 생각할 뿐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반성하고 다짐하고 또 실천해보면서 사는 거지, 영원히 내 말 잘 듣게 할 비법 같은 게 있나. 또 내 말이 무슨 신의 계율이라고 영원히 잘 들을 이유가 있나.
잠잘 시간, 아이와 나란히 누워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꼬맹이 갈수록 더 말썽이 많아지면 엄만 어떻게 하지"
"움...몰라"
"엄마도 모르겠다. 그냥 엄마는...계속 믿고 싶은 거 같애"
"응-"
"어떤 상황에서도 지안이는 엄마한테 제일 소중하다고"
"응-"
"지안이는 지금도 잘 자라고 있다고"
"응-"
"지안이 마음속에는 좋은 것이 많이 있다고"
"응-"
"어떤 상황이 오든 엄만 잘 해낼 거라고"
"응-"
뭘 알아듣는 것처럼 응응 하며 눈을 껌뻑이며 듣는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앞으로 여기에 '두 번째 소리친 날', '세 번째 소리친 날' 계속 적게 될지 모르겠지만(휴) 그렇다고 해도 아이 탓이나 내 탓이 아닌 다른 선택을 할 여유와 지혜가 내게 주어지길...
오늘 아침에 "지안아 일찍 일어나서 우리 더 많이 놀기로 했지? 이제 일어나자" 했더니 거짓말처럼 "응"하고 눈을 비비며 일어났습니다.(오잉) 셔틀 탈 시간에도 자기가 먼저 "엄마 긴 바늘이 2에 왔어" 얘기하고 신나게 등원했습니다. 오늘 실험은 대성공입니다. 어제처럼 레고를 촤르르 쏟으며 노는 아이를 바라보며 최근 제가 아이의 느닷없는 행동과 말들을 좀 무심하거나 무시하면서 대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운 다섯 살'은 아이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부모가 마음 속에서 차곡차곡 레고처럼 쌓아올려 만든 꼬리표는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