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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국 방구석 주부 Aug 04. 2022

다시, 시작. 리셋이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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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하면 버릴 짐들과 그러지 말아야  짐들을 구별해야 한다. 그런데  필요가 이사 전과 이사 후가 그렇게  달았던  같다. 주로 버리지 말아야  짐들엔 굉장히 삶이 윤택해지는 물건들이 많고, 버릴 짐들엔 마치 공기와 같아서 어디에 쓰는지 눈치채지 못하는 물건들이 많다. 그래서 막상 이사해서 짐을 열면 이건  들고 왔지 하는 물건과 도대체 그걸  버렸지 하며 후회하는 물건들이  생기게 된다.


이번에도 그런 물건이 한가득이다. 리셋의 달인인 우리 가족은 (이런 식으로 짐을 다 버리고 먼 거리 이동을 하는 이사를 한 적이 서로 워낙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름 합리적으로 생활에 필수적인 물건들을 잘 골라내고 지나치게 삶의 질만 연관된 물건들은 잘 버리고 왔다고 자부했다. 적어도 짐을 쌀 때는 그랬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정말 많은 것들을 버렸으니까.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합 16시간의 비행, 12시간의 경유지 대기를 합해 28시간의 여정이 끝이 났다.


문제는 공항에서 집까지 가는 방법이었는데, 나는 현지에서 콜택시를 부르면 될 것이라 주장했고, 아내는 렌터카를 쓰자고 주장했다. 내 생각에 계산해 봤을 때는 렌터카가 콜밴을 현지에서 섭외하는 것보다 비싸고 효율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오래 비행했는데 운전을 또 하라고?


결론만 말하자면 탁월할 선택이었다. 차가 없이는 어딜 갈 수가 없는 게 미국이다 말은 많지만, 그래서 나도 차가 없이 미국에서 생활한 기간은 길지 않지만, 그래도 샌프란에 있을 땐 불편하다고 생각했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보니 어딜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오면서 보니 인도도 없어 보였다. 가장 가까운 가게가 걸어서 십 분은 가야 한다. 그런데 며칠 전 현지 정착 에이전트가 보낸 톡에 현지 면허를 따야 차량 구매가 가능하다고 한다. 내가 있는 곳은 한국 면허가 있으면 주 발행 면허로 교환이 가능한 주라 다행이지만, 그러려면 영사관을 다녀와야 하고 영사관은 차로 여섯 시간 거리에 있다!


짐이 많아서 픽업트럭을 렌트했다. 미국에서의 로망 중에 하나가 픽업트럭을 가져 보는 것이었는데, 렌터카로나마 체험해 볼 수 있었다. 어이없는 건, 우리가 짐이 어찌나 많은지 그 많은 짐이 모두 실리자 픽업트럭 짐칸이 꽉 차 버렸다!


가까스로 렌터카를 타고 우리가 한 달 반전 계약한 아파트에 드디어 도착했다. 직접 보지 못하고 온 집은 많은 기대감과 함께 실망감도 주었다. 겉으로 보기엔 매우 좋아 보인다.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 구조다. 탁 트인 거실과 다이닝 공간, 사용 가능한 벽난로, 꼭대기 층이라 가진 아치 구조 천정, 30평 치고는 적은 방의 개수와 넓은 방과 옷장 수납공간, 오픈 파티오, 다 갖춰진 주방, 다용도실 가전 등. ‘아 맞아 미국은 이랬었지.’ 하게 된다.


반면 오래될 대로 오래된 주방 및 다용도실 가전, 오래된 화장실, 갑작스러운 카펫 바닥, 생뚱맞게 사라져 버린 천장 등, 십 센티는 올라와 보이는 주방 가운터 등 뭔가 구닥다리 같은 느낌을 주는 전형적인 오래된 아파트다. 미국에서 계속 살면서 왔으면 낯설지 않았을 텐데, 한국에서 브랜드 아파트의 안락함에 젖은 채 왔으면 기겁할 만도 하다. 이 또한 ‘아 맞아 미국은 이랬었지.’ 하게 된다.


예상대로 빌딩 현관에 잔뜩 우리 집으로 오는 아마존 물품들이 쌓여 있다. 이게 가늠을 할 수 없는 게, 한국에 있을 때 주문한 물건들은 다음날, 다다음날 다 와버려서 사람을 당황하게 하더니, 미국에 와서 주문한 물건들은 하나도 안 오고 있다. 일부는 가구처럼 무거운 물건들도 있어서 집으로 들고 올라가야 했다. 미국의 나름 운치 있는 삼층 아파트. 당연히 엘리베이터가 없다. 다 들고 올라가야 한다. 누구의 몫? 나의 몫이다.


오늘 가장 급한 것은 잠자리다. 지난 이틀간 잠을 모두 비행기에서 자서, 훌륭한 잠자리가 필요한데, 슬프게도 침대나 매트리스 등을 아직 구매하지 못했다. 그래서 급하게 주변 가게에서 우리 방과 아이 방에 놓을 매트리스를 사기로 했다. 하지만 아이케아는 너무 멀고, 당장 오늘 매트리스를 배달해 주는 곳은 없었다. 급한 대로 주변을 돌아다니는데, 매트리스 웨어하우스를 발견했다. 처음엔 너무 비싸서 그냥 나오려고 했는데, 아내가 학생이라고 하자 직원은 자기 여자 친구도 학생이라며 한 브랜드에서 라인업이 바뀌어 더 이상 팔지 못하는 매트리스를 보여주겠다고 한다. 가격도 굉장히 ‘리즈너블’하다. 그래서 재빨리 구매하고, 다행히 렌트했던 픽업트럭에 실을 수 있었다. 델라웨어 볼티모어에서 왔다는 특이한 억양을 가진 그 직원 땀까지 뻘뻘 흘리면서 트럭에 실어 주었다.


‘타겟’에서 필요한 생활 물품들을 더 사고, (생활 물품들 가격이 진짜 많이 올랐다.) ‘트레이더 조’ 아침저녁에 먹을 음식들을 구매했다. ‘트레이더 조’는 식료품점인데 과일과 야채, 그리고 각종 유기농 식품들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 과거 유학 시절에도 정말 좋아했었는데 이번에는 우리 집 바로 앞에 있다. 만족스럽다.


그렇게 이주 첫날이 다 지나갔다. 경유를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이주 첫날이 실제로는 한 4일이 지나 버린 것 같다. 다시 집에 돌아오니 잔뜩 쌓여 있는 풀지 못한 짐들과 풀지 못한 아마존 박스들이 우릴 주눅 들게 한다. 또다시 리셋이다. 또 완전 정착하는 데는 며칠, 또는 몇 달이 걸릴 거다. 싫다. 적응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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