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30일(이주 519일 차)
나는 어렸을 적부터 옷을 좋아했다. TPO에 맞게 옷을 입기를 즐겨했고, 패션 잡지도 구독할 정도였다. 다양한 스타일을 좋아해서 캐주얼한 느낌에서 드레스업 된 느낌까지, 수타일을 확확 바꾸며 스타일링을 하고 다녔다. 완전한 자율 복장이 보장되는 (오히려 편한 복장이 강요되기까지 하는) 직장에서 동료들에 비해 약간 오버드레스한 느낌이 들도록 하고 다녔다. 인생의 첫 직장이었던 방송국에서 조연출 첫 출근날, 새벽 음방 녹화와 함께 3일간 밤샘 편집을 해야 했음에도, 첫 출근이라는 이유로 슈트에 핏한 느낌의 반코트를 입고 출근했을 정도다.
그러던 내가 주부가 되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을 하지만 진척이 없는 것이 주부의 업무다. 나의 옷차림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직업이다. 내가 회사에서 입다가 싸들고 온 옷들은 미국에 온 뒤 단 한 번도 입지 않았다. 매일 내가 입는 옷은 맨투맨 티셔츠와 면운동복 바지 각 세 벌을 컬러별로 믹스 앤 매치해 입는다. 여름엔 긴팔이 반팔로 바뀔 뿐이다. 미국에 오면서 가족 외의 사람들을 만날 일도 사라졌다. 나머지 옷들은 모두 잉여다.
빨랴를 할 때마다 조금 자괴감이 들 때가 있다. 아내와 아이는 학교에 다녀올 때마다 겉옷과 속옷을 산더미만큼 쌓아 놓는다. 세탁기에 빨랫감을 넣거나 다 마른 옷가지들을 갤 때면, 내 옷은 가뭄에 콩 나듯 나온다. 마음이 헛헛해진다. 나같이 옷 좋아하는 놈이 뭘 입고 사는지 원.
오늘도 건조기에서 빨래를 개는데, 산더미 같은 아내와 아이 옷 사이의 내 맨투맨 티셔츠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하나같이 티셔츠의 앞면이 꼬질꼬질하다. 방금 빤 옷들인데도 얼룩 같은 것들이 잘 지워지지 않은 모양이다. 며칠 전에도 얼룩을 봤던지라 이번에 세탁기를 돌릴 때는 세탁기에 넣기 전 세제를 바르고 문지른 뒤에 빨았는데도 지워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주방일을 하면서 튄 기름 같은 것들의 얼룩인 듯하다. 바지엔 청소하면서 쓴 락스물이 튀어 탈색된 점들도 있다. 회사를 다닐 때에야 외부에서 입는 옷들과 집에서 생활할 때 입는 옷이 완전히 구별되다 보니 생활복의 기름때 같은 건 잘 인식하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저 맨투맨 티셔츠 세네 벌이 나의 외출복이자 생활복이자 유니폼이다. 저 기름때는 나의 직업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한다.
일의 능률을 위해 불필요한 것에 신경을 덜 쓸 수 있도록 자율복장을 권장하는 회사들이 많아지고 있다. 나도 불필요한 허례허식을 위한 차려입기를 매우 싫어하는 편이다. 아무리 패션을 좋아해도 여름철 출근룩의 완성은 반바지였을 정도다. 하지만 옷차림이 마음가짐을 좌우하기도 한다고 한다. 재택 근무자들이나 프리랜서들이 집에서 일을 할 때, 일과 일상을 구별하는 방법으로 옷을 갈아입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대단한 출근룩이 아니라 그저 옷을 갈아입는 것만으로 일을 생활에서 구별해서 일을 할 때는 보다 집중해서 하고, 생활에서는 일에서 해방된 상태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빨랫감들 사이의 내 출근룩이자 생활복인 맨투맨 티셔츠들을 보면서, 나에게도 이런 구별을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부는 늘 집안일에 치인다. 빨래를 해도 또 빨랫감은 쌓이고, 밥은 삼시 세끼를 먹는 데다, 집안 바닥은 늘 먼지공장이다. 시간을 많이 쓰는 건 아니지만 프로그레스가 없는 일상의 반복은, 24시간 치이게도 하고 늘어지게도 한다. 이 시간을 구별하고 일상을 지키며 본업인 집안일에도 보다 적극적으로 임하게 할 만한 뭔가가 필요하다. 주부도 엄연히 프로다.
아마존에서 앞치마를 주문했다. 이런 걸 살 때는 늘 최저가만 샀었는데, 이번에는 일부러 가격도 좀 있고 (그래봐야 20불이다) 좀 멋있는 걸로 샀다. 거친 불과 기름이 난무하는 강렬한 레스토랑의 주방에서 입을 법한 느낌으로다가. 새해에는 조금 더 프로액티브하게 주부로서의 내가 멋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부도 멋있다. 일상 스타일의 추레함이 그 멋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