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여름, 시드니 - 2.
심장이 두근거린다.
엄마가 운전하는 은색 소나타 2의 조수석에 앉아 창밖의 풍경을 바라본다. 낮게 스쳐 지나가는 여객기가 보인다. 카오디오에서는 둥둥둥둥하는 심장소리와 같은 깊은 베이스 반주에 거친 남자의 보컬이 진하게 울려 퍼진다.
'바람처럼 스쳐 가는 정열과 낭만아'
거대한 영종대교의 외관이나 서해의 드넓은 갯벌 모습에 감탄할 만도 한데, 세계 최대 규모라는 영종대교의 어마어마한 구조물도, 그 너머 힐끗 보이는 물 빠진 갯벌의 모습도 나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성인이 되고 나서 해외를 나간 적이 없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배낭여행이 유행이라는데, 1, 2학년 땐 교회 중고등부 선생님 하느라 방학 때마다 바빴고, 3학년 때는 ROTC 하계 동계 훈련으로 바쁜 데다가 해외를 가겠다고 허가를 받을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선배들이 무서운지.
이제는 4학년이다. 힘겨웠던 1년 차가 지나고 2년 차가 되니 눈치 볼 무서운 선배들의 눈총도 사라졌다. 과감하게 훈육관님께 해외여행 허가서를 받았다. 그래도 평소의 쫄보와 같은 나의 모습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다.
해외여행에 대한 특별한 열정이 있지는 않았다. 교회 일정 때문에, 혹은 ROTC 때문에 해외여행을 갈 수 없는 현실이 아쉽기는 해도, 또 그러면 그런대로 그냥 그렇게 방학을 보냈다. 남들은 배낭여행이나 어학연수를 가겠다고 알바도 하고 돈도 모으고 하던데, 굳이 그래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이번의 여행은 다르다. 너무 가고 싶었다. 그래서 동계 훈련 가기 전, 불과 2주 만에 해외여행 허가서를 발급받고, 구청에서 여권 신청까지 마쳤다. 준군인의 신분으로 이런 절차를 거치는 것은 매우 귀찮은 일이다.
그럼에도 이번 여행은 이를 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간절했다. 호주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가. 대자연이 숨 쉬는 땅, 그리고 이모 가족이 살고 있는 곳. 반가운 방문이 될 것이다.
모든 변화는 이 한마디에서 시작했다.
'나랑 같이 가자.'
이 말을 듣기 전까지는 생각도 못했던 여행이지만, 그래도 졸업을 1년 앞두고 호주라는 이국적인 곳에서 한 달을 머물게 됐다. 어차피 4학년 여름이나 겨울엔 졸업과 입대를 앞두고 있어서 더 정신없을 거다.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번 겨울이 어쩌면 해외를 경험할 가장 완벽한 기회다.
엄마의 소나타 2가 주차장에 들어선다. 전에 보지 못했던 커다란 주차장이다. 2년 전 개장한 인천공항의 위엄이 대단하다. 주차장이 이렇게 넓은 걸 본 적이 없다. 이 넓은 주차장을 다 채울 수 있으려나 싶다.
'넌 그렇게 갑자기 호주엔 가겠다고 해서.'
엄만 며칠 전부터 계속 투덜거린다. 내가 갑자기 호주 여행을 가겠다 한 탓에 엄마의 이번 겨울 해외 탐방 계획은 무산됐다. 매년 연초가 되면 엄만 건축사 친구들과 함께 해외 유명 도시 탐방을 가곤 했다. 아빤 평소에 엄마의 이런 해외 탐방을 탐탁잖아했었는데, 내가 해외여행을 가게 되었으니 엄마는 이번 겨울만은 쉬어가게 됐다.
'걔가 꼬셔서 가는 거 아냐?'
'아니라니까! 걔는 그냥 유학, 난 이모도 볼 겸 놀러 가는 거지. 날짜가 맞아 같이 가는 거야.'
엄만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며 코웃음을 친다.
'이모를 보러 간다고? 웃기지도 않아.'
'아니, 그러니까 뭣하러 여기까지 와? 내가 어린애야? 공항버스 타고 오면 될걸, 뭘 여기까지 데려다주면서 계속 불만이야?'
이제 나이가 스물셋인데 아들 사랑이 각별하다 싶겠지만, 착각이다. 그저 공항과 해외여행을 애정하는 것뿐이다. 갑자기 결정하긴 했으니 좀 미안하긴 하지만, 매번 갔던 해외여행 이번 겨울만 용서해 주시라고요.
마치 커다란 딱정벌레를 닮은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공상과학 영화의 장면을 연상시키는 모습이 드러난다. 마치 미래의 기차역을 닮은 듯한 거대한 구조물이 있는데, 아직 철도가 개통되진 않았단다. 아마 자기 부상열차와 같은 미래의 철도가 연결되지 않을까 싶다. 안 그래도, 서울서 공항이 너무 멀다.
대합실로 향하는 구름다리에 다다르자, 기다란 무빙워크가 보인다. 실제로는 처음 본다. 무빙워크에 올라 캐리어를 끌며 걸어가자, 마치 축지법을 써서 걷는 것 같다. 초조한 마음만큼이나 재빠르게 대합실로 향한다. 무빙워크의 끝에 다다르고, 마지막으로 대합실 앞의 문이 열린다.
마음이 바쁘다.
군 미필인 해외 여행자는 먼저 공항 내 병무청 사무소에 들러 해외여행 신고를 해야 한다. 먼저 여권과 학군단에서 발급한 해외여행 허가서가 필요하다. 만약 신고를 하지 않고 출국했다간 병역기피자 취급을 받을 수 있다. 어서 신고를 마치고 나야 체크인을 할 수 있다.
아시아나항공 체크인 에일을 찾아 나선다. 공간이 너무 넓은데 처음이라 어디가 어딘지 찾기가 쉽지 않다. 우측으로 꺾어 한참을 가는데, 아시아나 체크인은 반대쪽이란다. 헐레벌떡 방향을 꺾어 다시 에일을 찾는다. 뭐 이렇게까지 넓나 싶다. 사람이 많지도 않구먼.
'여기야.'
그녀다. 손을 흔들고 있는 그 아이에게 활짝 웃으며 다가간다. 그녀 옆엔 그녀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함께 있다. 처음 뵙는다. 그녀도 우리 엄마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다. 그녀는 엄마와 안면이 있다. 수년 전이긴 하지만 함께 다니던 교회에서 몇 번 마주친 기억이 있다.
'나 빨리 가서 해외여행 신고 하고 올게.'
해외여행 허가서를 찾는데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잘 챙긴다고 꼭꼭 캐리어 속 깊숙이 넣은 듯하다. 허둥지둥 캐리어를 눕히고 열어 허가서를 찾으려 하는데, 그녀의 동생이 깜짝 놀란다.
'어, 어! 잠깐만요.'
나도 깜짝 놀라는데, 보니까 내가 캐리어를 눕히려던 바닥이 오물로 더럽혀져 있었다.
'얘, 왜 이래.'
그녀가 반쯤 상기돼 있는 내 어깨를 잡아 끈다.
'응, 응.'
다섯 명의 사람들 사이에서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사실 별 의미 없는 조합이다. 나의 엄마와 나,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그녀. 그런데 묘하다. 사실 다들 어떤 감정일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냥 빨리 해외여행 허가 처리하고, 체크인하고, 출국 수속받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저 툴툴대는 엄마의 태도가 성가실 뿐이었다.
절차를 마치고 출국 수속을 위해 줄을 섰다.
'갈게.'
그녀가 어머니와, 그리고 여동생과 포옹을 한다. 그리고는 세 모녀는 눈물바다가 된다. 그제야 깨닫는다. 나야 그저 한 달 후면 돌아올 조금 긴 여행에 불과하지만, 그녀는 수년이 걸릴 유학을 떠나는 길이라는 걸. 그 순간이 조금 낯설었다. 함께 가는 사람일 뿐, 저들의 슬픔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다가와 말씀하신다.
'같이 가서 참 든든하네. 잘 적응하게 도와줘.'
'네, 걱정 마세요.'
눈물의 이별을 한 그녀와 함께 출국 수속을 마치고, 탑승구 앞의 벤치에 앉아 비행기 탑승을 기다린다. 겨울의 짧은 해 탓에 어느덧 창밖 활주로 너머 지평선은 얇은 노을과 함께 차디찬 어둠이 하늘을 덮는다.
비행기에 타서도 그녀의 눈물은 쉽사리 그치지 않는다. 어쩌면 그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긴 여정에 누군가 함께해 주기를 바랐고, 그래서 나에게 '같이 가자'라고 말한 게 아닐까. 자신의 여행에만 집중해 잔뜩 들떴던 스스로의 옹졸함이 부끄럽다. 울고 있는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위로해 준다.
'내가 잘 정착하게 많이 도와줄게.'
'...'
살포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한 달간 그녀가 호주에 완벽하게 적응하도록 돕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비행기가 뜬다. 자고 일어나면 남반구의 거대한 대자연의 대륙 호주의 시드니에 도착할 것이다.
저 먼 하늘 끝엔 뭐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