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여름, 시드니 - 3.
'손님 여러분, 잠시 후 식사가 제공됩니다.'
어릴 적, 일본으로 가족여행을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탔던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일까. 장시간 비행이라는 낯선 경험이, 나에게는 설렘으로 다가왔다. 이륙할 때 느껴지는 귀의 먹먹함마저, 괜히 마음을 벅차게 만들었다.
곧이어 제공된 기내식은 우아하게 소고기로 골랐다. 식전빵과 소스로 절여진, 웰던이라기보다는 속까지 푹 익혀진 질긴 소고기 큐브 스테이크, 방울토마토가 곁들여진 샐러드, 그리고 디저트로는 과일이 나왔다. 고기는 퍽퍽했지만, 어쨌든 스테이크였다. 나이프와 포크를 단정히 쥐고 조심스럽게 썰어 먹었다. 승무원에게 와인을 부탁하자, 투명한 플라스틱 컵에 레드 와인이 조심스레 담겼다. 고기와 은근히 어울리는 맛이었다. 괜히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나 홀로 비즈니스석에 앉은 우아한 승객인 것처럼, 고기를 씹으며 옆자리에 앉은 그녀를 힐끗 본다. 그녀는 스크린 속 미국 드라마 '프렌즈'에 시선을 고정한 채, 기내식 트레이의 샐러드를 천천히 먹고 있다.
'왜?'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냐.'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렸지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함께 나란히 비행기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을 간질였다. 신혼여행이라도 가는 기분이랄까. 물론, 우린 친구다. 그 이상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마음속에 일어나는 이상한 감정을 눌러본다.
식사가 치워지고, 곧 기내의 불이 꺼진다. 승객들의 잠을 위해 어두워진 조도 속에서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채널을 돌려본다.
그러던 중, 그녀의 고개가 내 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나는 조심스레 어깨를 움직여 그녀의 머리가 편히 기댈 수 있도록 자세를 맞춘다. 말은 없지만, 그 온기가 고맙다.
'손님 여러분, 잠시 후 시드니 공항에 도착하겠습니다. 좌석벨트를 매주시고 창문 커튼은 열어주십시오.'
거의 열 시간에 가까운 비행이 끝나간다. 적도를 지나 남반구의 대륙을 향해 날아온 아시아나 항공기는 이제 시드니에 도착하려 한다.
창문 커튼을 올리자, 저 멀리 구름 너머로 햇살이 번진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창곡동 내무실에서 새벽을 맞았는데. 오늘 아침은 하늘 위에서 조용히 밝아오고 있었다.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고, 옅은 구름 아래로 시드니의 풍경이 펼쳐진다. 길을 따라 나란히 늘어선 낮은 주택들과 군데군데 보이는 넓은 잔디밭. 서울과는 다른 그 조용하고 정돈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이곳에서 살아간다면, 어쩌면 꽤 평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 옆에 그녀가 함께라면... 스스로 멈칫하며 고개를 돌린다. 그런 생각은 아직 이르다.
비행기가 멈추고, 승객들이 천천히 일어선다. 먼저 일어난 그녀의 붉은 기내용 캐리어를 조심스레 내려준다. 꽤 묵직하다. 유학을 온 그녀와 한 달 여행인 나 사이의 짐은 무게부터 달랐다. 내 캐리어는 이모가 부탁한 물건들로 채워졌을 뿐, 정작 내 물건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이모가 나오신다고?'
'아니, 이모부가 나오신대.'
그녀가 혼자였다면 유학원 라이드 서비스를 신청했을 테지만, 나와 함께여서 이모부께 부탁드릴 수 있었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수하물 공간으로 향한다. 우리가 타고 온 비행기의 코드 사인을 찾고,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선다. 짐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한다. 그녀의 붉은 천 캐리어와 내 짙은 청회색 캐리어가 나란히 모습을 드러낸다. 조용히 다가가 짐을 들어 올린다.
'짐이 생각보다 많이 없네.'
'처음엔 홈스테이라. 나중에 많이 사야지.'
그녀가 말하며 짐을 카트에 포개 쌓는다.
'이제 갈까?'
'응.'
세관 구역은 까다롭다고 들었지만, 우리는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다.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절차들이 순조롭게 지나간다.
게이트를 나서자 입국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보인다. 대부분은 서양인들이다.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영어들이 귓가를 스친다. 낯선 나라에 왔다는 실감이 밀려온다.
그 순간, 저쪽에서 누군가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온다. 이모부다.
'이모부.'
카트를 밀며 다가간다. 십여 년 전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신 후 시드니에 정착하신 분이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악수를 청하신다. 살짝 당황했지만 손을 내민다.
'안녕하세요.'
'제 친구예요. 이번에 UTS 다니게 됐어요.'
그녀를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냥 친구일 뿐인데,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된다. 꼭 무언가를 숨기는 사람처럼.
'차로 빨리 가자. 이 앞으로 가면 돼.'
'네.'
자동문이 열리자, 뜨거운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남반구의 2월은 그렇게,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2월의 시드니는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