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여름, 시드니 - 4.
'철컹, 철컹... 철컹, 철컹...'
다운타운으로 향하는 전철 안은 찜통이다. 지금이 대체 몇 년도인가. 2000년대도 몇 년이나 지났건만, 아직도 에어컨 없는 전철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이모댁이 있는 파라마타에서 시드니 시내의 타운홀 역까지는 40분 남짓 걸린다. 아침 일찍인데도 객차 안은 더위가 후끈 밀려든다. 서울의 서늘한 지하철에 익숙하다 보니, 창문을 연 시드니 전철은 금세 땀을 부른다. 거기에 복층 객차라 천장도 낮아서 답답함이 배가된다.
그녀는 오자마자 바로 어학원 출석을 시작했다. 그녀가 합격한 대학교는 9월부터 학기가 시작하는데, 그전에 어학원을 다녀야 하는 조건부입학이란다. 점심때가 되어서야 수업이 끝나지만, 나는 그녀가 어학원에 있는 동안 시내 관광을 조금 할까 한다.
시드니의 2월은 정말 덥다. 아침에도 기온이 25도를 넘어간다. 오후에는 35도는 족히 넘어간다. 그나마 건조해서 쩍쩍 달라붙는 느낌은 없다. 대신 하늘은 정말 맑다. 파란 하늘과 드넓게 펼쳐진 초목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어디에나 잔디밭이 있고, 사람들은 평화롭게 잔디에 누워 일광욕을 즐긴다. 사촌누나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담긴 사진들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없었는데, 그게 모두 시드니의 날씨 덕분인가 싶다.
영어 방송은 하나도 들리지 않고, 기차역 이름만 뚫어지게 쳐다본다. 도심에 접어들자 지상을 다니던 시티레일은 지하철로 바뀌고 곧이어 타운홀 역에 다다른다.
지상역엔 없던 개찰구에 표를 넣고 나와 지상으로 나오자, 시드니의 중심부가 펼쳐진다. 시계탑이 인상적인 타운홀 건물 앞으로는 너른 광장 공간이 펼쳐져 있고, 주변을 싸고 있는 현대적인 빌딩과 유럽풍의 건물이 인상적이다.
빅토리아 풍의 백화점 QVB를 지나 그녀의 어학원 위치를 먼저 확인한다. 오늘은 휴대폰이 없기 때문에 미리 위치를 확인해 놓지 않으면 그녀와 엇갈릴 수도 있다. 내일부턴 고등학생인 사촌동생의 휴대전화를 빌려 쓰기로 했다. 오늘은 미리 약속을 잡고 나왔다. 그녀의 어학원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그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예전에 휴대폰이 없었을 땐 어떻게 만남을 조율했을지, 불과 몇 년 전인데도 이젠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직 아침 아홉 시다. 그녀와는 한시에 만나기로 했다. 오전에는 홀로 시내 구경을 해야겠다. 누구나 다 아는 오페라 하우스나 거대한 조형미를 가진 하버브리지를 보러 가야지. 먼저 인도에 위치하고 있는 안내 입간판의 지도를 보며 오페라 하우스로 가는 길을 익힌다. 십여분 걸으면 도착하겠다 싶다.
두세 블록을 지나자 건물들이 사라지고 너른 공원이 펼쳐진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벼운 반소매 운동복 차림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은 채 조깅을 하고 있는 한 사람과 그 너머의 푸른 잔디, 우거진 나무들, 그리고 또 그 너머의 유럽풍 건물들, 그 위에 보이는 시드니 타워의 모습이 마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그려낸 엽서의 한 장면과 같다. 이곳에서의 삶이 근사해 보인다. 관찰자일 수밖에 없는 내 처지가 아쉽다.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 브리지를 천천히 지나치며 마음을 달랜다. 다시 시내로 향하는데 길을 약간 다르게 들어섰는지, 갑자기 커다란 정방형의 공원이 나타난다. 아직도 그녀를 만날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공원에 잠시 들러 벤치에 앉아 있기로 한다. 공원에도 망중한을 즐기는 이들이 많다. 평일 오전 도심의 공원에서 이렇게 여유로움을 즐기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 매우 놀랍다.
공원 내부를 가로지르는 산책로 한 편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주변의 풍경과 일상을 사는 현지인들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는데, 한 노년의 부부가 다가와 건너편 벤치에 앉는다. 팔십에 가까워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데도 나란히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두 분의 모습이 참 좋아 보인다. 마주 앉은 그들의 다리엔 시간이 내려앉은 것처럼 보였다. 잠시 상상해 본다. 좋은 사람을 만나 저렇게 함께 나이 들어가는 그런 모습을 그린다. 어렸을 땐 그저 젊은이들의 청량한 사랑만이 아름다워 보였는데, 이제 대학 졸업반에 이르다 보니 더 멀리 보는 관계를 소망하게 된다.
길을 뺑 돌아 다시 QVB 앞으로 향한다. 열두 시가 지나고 오후가 되자 기온은 계속 올라 30도를 넘어선다. 오전의 햇살과는 또 다르다. 한국의 여름처럼 습한 느낌은 없어서 그늘에만 들어가도 금방 시원해지지만 그래도 햇살은 무척이나 뜨겁다. 더위를 싫어하는 그녀. 오늘도 심기가 배배 꼬이지 않을는지 걱정이 앞선다.
어학원 앞에서 그녀가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그녀가 나오면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야겠다. 영연방 국가에선 피시앤칩스가 유명하다던데, 함께 먹자고 해야지.
그때 문이 열리고 그녀가 나온다.
'끝났어?'
'응.'
'우리 밥 먹으러 갈까?'
도리도리. 그녀가 고개를 젓는다.
'은행 먼저 가자. 여행자 수표 빨리 입금하고 싶어.'
'그래, 가자.'
나야 여행으로 왔으니 큰돈을 환전해 올 필요가 없었다. 거기에 이모가 계시니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녀는 이곳에 정착하기 위한 비용을 싸들고 왔어야 했다. 100달러보다 큰 금액으로 발행받을 수 있는 여행자 수표지만, 그럼에도 십수 장에 이르는 여행자 수표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불안했던 모양이다. 먼저 근처에 있는 호주의 대형 은행, 커먼웰스 뱅크를 찾았다.
'나 계좌를 개설하고 싶어서 왔어.'
그녀의 영어 실력에 새삼 놀란다. 지난해 그녀는 뉴질랜드에서 어학연수를 했다고 한다. 원래 어학연수를 하면 저렇게 영어를 잘하는 건가? 불과 1년이 조금 못되게 있었다고 하던데, 소통에 거의 지장이 없는 그녀가 대단해 보인다. 나름 그녀가 이곳에 적응하는 걸 돕겠다고 같이 왔는데, 오히려 말 한마디도 못하는 나 자신이 그녀에게 짐이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다.
'여행자 수표를 입금하고 싶어.'
'그럼 여행자 수표랑 여권 줄래?'
그녀가 직원에게 여권과 함께 봉투에 담긴 여행자 수표들을 건넨다. 직원이 봉투를 열어 그녀의 여행자 수표를 확인하더니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이거, 수표의 사인이 다 다르네?'
'응. 내가 다 다르게 했어.'
'이럼 곤란한데.'
여권 서명과 다른 서명이 담긴 수표는 원래 입금이 안 된단다. 서명 문화가 없는 한국인에겐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실수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수표 한 장 한 장에 다 다른 서명을 한 그녀를 보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방금 전까지 술술 영어를 구사하며 내 도움 하나도 없이 씩씩하게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던 그녀가 허점을 보이니 그렇게 귀여워 보일 수가 없다. 아, 여전히 내가 도와줄 빈틈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슬쩍 미소가 지어진다.
나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이래저래 방법을 강구한 은행 직원의 도움으로, 무사히 여행자 수표를 입금하고 은행을 나섰다. 그 사이 햇살은 더 뜨거워지고, 허기는 더 강해진다.
'이제 밥 먹으러 갈까?'
'입맛이 사라졌어. 커피 먹으러 갈래.'
'응.'
그녀와 함께 QVB 안으로 들어섰다. 백화점 안에 있는 카페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달달한 아이스 카페 모카를 주문했다. 직원이 마시고 갈 거냐고 묻는다.
'노, 테이크어웨이.'
한국에선 테이크아웃이라 했던 말. 이곳에선 그렇게 말해야 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커피를 마시지 않았던 그녀다. 막 스무 살이었던 그때보다는 우리가 조금 더 컸나? 하는 생각이 든다.
카페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공간이 넓지 않은 아케이드식 백화점인 QVB는 빅토리아 시대의 화려한 장식이 넓은 공간 곳곳을 채우고 있다. 그녀가 아이스 모카를 마시며 더위를 식히는 동안 주변을 둘러본다. 아이와 함께 쇼핑을 하고 있는 가족단위의 현지인들이 보인다.
'오늘 공원에 있는데 노부부가 함께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어.'
'그래?'
'우리도 그렇게 늙었으면 좋겠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잘해봐.”
말뜻을 묻기도 전에, 그녀는 커피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뒤늦게, 그 말의 무게를 되짚었다. 잘해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QVB에서 나왔다. 해가 지고 있었다. 이 도시의 여름은 긴데, 그녀와 함께한 오후는 짧았다.
시티레일을 타고 그녀의 홈스테이와 가까운 채스우드로 이동해서 웨스트필드 안의 마트에 들렀다. 몇몇 생활용품과 먹을거리를 구매했다. 둘이서 카트를 밀며 식료품을 고르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치 부부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녀는 손에 든 우유팩을 나에게 보이며 웃었다. 둘이 결혼하고 살면 이렇게 살려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함께 시티레일을 타고 그녀를 홈스테이 집에 데려다주고 나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아홉 시가 다 되어 간다. 그러고 보니 아직 해가 지지 않은 것이 어색할 시간이다. 괴상한 동물 소리에 깜짝 놀라 하늘을 보니 박쥐 떼가 날아가고 있다. 타지에서 그녀를 데려다주고 다시 이모댁으로 돌아가려 하니, 괜히 헤어지는 것이 더욱 아쉽다.
하지만 발길을 서둘러야 한다. 고든역에서 파라마타까지는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린다. 어서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