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입술보다 먼저 다가간 마음

2월의 여름, 시드니 - 6.

by jcobwhy

“다녀오겠습니다!”


이모댁 문을 나서는 발걸음은 여전히 가볍다. 지난 3주간, 나는 매일 아침 시드니 도심으로 ‘출근’하듯 향해왔다.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시내를 서성이다가 오후가 되면 그녀를 만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오늘도 같은 길, 같은 루틴. 그런데 마음만은 다르다.


어제 고든 역. 그녀를 집에 바래다주던 그 길에서, 나는 그녀를 안았다. 나조차 준비되지 않은 행동이었지만—그녀는 뿌리치지 않았다. 그 짧은 포옹은 말없이 많은 걸 이야기한 것만 같았다. 나는 웃고 있었다. 바보같이, 아주 조금 설레며.


파라마타 역까지는 걸어서 10분. 이른 아침, 길거리는 비어 있다. 호주는 넓다. 부도심에서는 웬만하면 사람들이 걷지 않는다. 심지어 전철역이 코앞인데도 대부분 차를 몰고 와 주차장을 찾는다. 열흘쯤 전에는 그것도 문화 차이라며 이해하려 했는데, 요즘은 그냥 게으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짧은 경험이 선입견이 될 줄은 알지만, 오늘은 괜히 한마디 툭 내뱉고 싶다.


역에 도착해 티켓을 산다. 여기엔 개찰구도 없다. 검표도 거의 없다. 가끔 불시에 단속한다고 하지만, 그마저도 본 적이 없다. 사실상 양심 티켓. 도심 구간엔 개찰구가 있어 무임승차가 어렵겠지만, 이런 외곽 역들에선 티켓을 안 사는 사람도 꽤 많을 거란 생각이 든다. 도시의 관대함이 낯설다.


열차에 올라 도심으로 향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무료하지만 평화로운 오전이다.


하이드 파크 옆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나왔다. 로컬 카페가 훨씬 멋스러워 보이긴 하지만, 메뉴 이름이 낯설다. 호주의 커피는 ‘롱블랙’이다, ‘플랫화이트’다—이런 말들이 익숙하지 않다. 괜히 한참 줄 서 있다가 “아메리카노요” 했다가 민망했던 기억도 있다. 오늘은 그냥 익숙한 쪽을 택했다.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공원은 고요하고, 아침 햇살은 부드럽다. 평일 오전인데도 사람들은 여유롭고 웃고 있다. 이 나라는 왜 이렇게 평화로워 보일까. 아니, 나는 왜 이렇게 마음이 복잡한 걸까.


이국의 하늘 아래서, 나는 여전히 누군가만 기다리고 있다.


점심 무렵, 다시 QVB 옆 어학원 앞으로 향했다. 문 앞 그늘에 서서 기다린 지 십여 분쯤 지났을까—익숙한 걸음으로 그녀가 나온다. 딱히 웃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끝났어?”

“어? 우리 다섯 시에 보기로 하지 않았어?”


약간 놀란 얼굴. 장난 반 진심 반으로 말을 꺼내본다.


“요리하는 거… 도와주려고 일찍 왔지.”


말을 잇는 사이, 슬쩍 그녀의 허리께로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그녀가 몸을 옆으로 피한다.


“더워.”


짧은 한마디. 딱 잘라 말한 건 아니지만, 거리 두기가 분명해졌다.


“아, 응… 그냥 도와줄까 해서.”

“괜찮아. 안 도와줘도 돼.”


대화가 흐르지 않는다. 말보다 더 확실한 신호다. 어제 고든역의 그 포옹—그게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그녀는 두 걸음 물러난다. 어딘가 찬물 한 바가지 끼얹은 것 같은 기분이다. 애써 침착하려 해도, 속은 조금씩 상해 간다. 대체 어디까지가 괜찮고, 어디부터가 선을 넘은 걸까. 내 감정은 앞질러 가고, 그녀는 제자리다. 그러니 그 거리는 점점 더 벌어진다.


타운홀 역에서 시티레일을 타고 그녀의 홈스테이, 고든 역으로 향한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세 시. 도착하면 한 시간 남짓 안에, 태어나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잡채를 완성해야 한다.


“너, 진짜 잡채 할 줄 알아?”

“대부분 인스턴트인데? 라면이랑 다를 게 있겠어?”


듣고 보니 허술하다. 당연히 별 계획도 없어 보인다. 이럴 줄 알고 아침에 이모에게 부탁해 잡채 조리법을 받아뒀다. 한 장 짜리 손글씨 메모. 어쩌면 이걸로 그녀에게 점수를 딸 수도 있지 않을까—은근히 기대된다.


잡채는 보기엔 평범하지만, 만들기는 절대 쉽지 않다. 들어가는 채소도 많고, 재료 하나하나를 따로 볶아야 한다. 조화롭게 간을 맞추는 일도 만만치 않다. 특히나 당면—처음 삶아보는 재료다. 이모 말로는 “조금만 방심하면 서로 들러붙어 떡처럼 된다”라고 했다.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요리 하나 망쳤다고 세상이 무너지진 않겠지만, 이상하게 오늘은 실수하고 싶지 않다. 그녀와 함께 만드는 첫 요리. 무탈하게 완성되길, 메모를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그녀와 함께 홈스테이 집에 들어섰다. 현관문이 열리자 젊은 부부가 반갑게 맞아준다. 오늘이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이라고 했다. 중년이나 노년 부부가 홈스테이를 운영한다는 이미지와는 달리, 이 집은 분위기부터 산뜻했다. 그녀와 오래 알고 지낸 부부인 듯, 서로 반갑게 안부를 나눈다.


나는 마음이 급하다. 인사를 마치자마자 앞치마부터 챙겼다. 주방 중앙, 넓은 아일랜드 식탁에 마주 서서 요리를 시작한다. 미리 사두었던 당근, 파, 양파, 버섯을 하나씩 꺼내고, 채 썰기부터 들어갔다.


칼끝이 도마에 닿는 소리가 작게 울린다. 둘 다 칼질은 서툴다. 일정한 길이를 맞추려고 눈을 잔뜩 부릅뜨고 집중하다 보니, 말이 뚝 끊긴다. 말 대신 고요한 주방에 도마 소리만 번진다.


또각, 또각…


시끄러운 것도 아닌데, 둘 다 그 소리가 웃긴가 보다.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피식, 그러다 동시에 웃음이 터진다.


“하하하하.”

“하하. 우리 진짜 못한다, 그치?”

“처음이잖아. 거의.”


그녀는 냄비에 물을 올리고 라면처럼 포장된 당면을 조심스레 넣는다. 나는 손질한 채소를 팬에 담고 기름에 볶는다. 간은 어렵지 않다. 인스턴트 포장 안에 들어 있던 양념 소스—간장과 요리술, 설탕과 참기름에 MSG가 절묘하게 섞여 있을 법한 검은 액체—를 믿기로 한다.


잠시 뒤, 주인집 여성분이 고개를 빼꼼 내민다.


“뭐 필요한 거 없어요?”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답한다.


“괜찮아요. 혹시 냄새가 거슬리면 꼭 말씀해 주세요.”


“아뇨, 너무 좋은 냄새예요. 기대돼요.”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지만, 나는 오히려 긴장이 배로 늘었다. 잘 돼야 한다. 이건 단순한 요리가 아니다. 평가받는 자리니까.


당면은 삶은 뒤 찬물에 헹구고, 채소와 버섯은 따로따로 볶아 볼에 담는다. 그리고 마침내—포장을 뜯어 양념장을 부은 뒤,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조물조물 비빈다. 적당히 무쳐진 당면 한 가닥을 집어 그녀 쪽으로 건넸다.


그녀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스럽게 입을 벌린다.


“어때?”


그녀는 천천히 씹는다.


“으음! 괜찮은데?”


그 웃음, 그 반응. 예상 이상이었다.

괜히 기분이 좋다.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난다.


다행히 우리가 만든 잡채는 꽤 괜찮았다. 주인 부부가 준비한 다른 요리들과도 제법 어울렸고, 네 살짜리 꼬마 아이가 젓가락으로 잡채를 쿡쿡 찌르다 한입 크게 넣는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내 영어 실력으론 전부 따라가진 못했지만, 부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귄 사이라는 것, 대학에선 멀리 떨어져 지냈지만 졸업을 앞두고 다시 만나 결국 결혼에 이르렀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로맨틱 코미디의 설정처럼 들렸다.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를 챙겨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작은 방. 커다란 침대가 공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녀가 먼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는다. 나도 그 옆에 앉았다.


나는 미처 다 이해하지 못한 이야기의 빈틈을 그녀가 채워준다. 주인 부부가 처음 만났던 날, 오랜만에 다시 마주친 순간,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하지만, 어딘가 따뜻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다 무심히 말했다.


“우리 이야기보단 재미없지 않아?”


그녀가 눈을 흘긴다.


“뭐래. 우린 친구 사이잖아.”


나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난 너랑 친구로 남기 싫어.”


그녀가 잠깐 고개를 든다. 눈동자가 조금 흔들린다. 왜 놀라는 거니. 너도 알고 있었잖아.


“그냥 사귀자. 내가 친구 하려고 여기까지 왔겠어?”


“그거야 이모 댁에 온다고…”


“그건 그냥 핑계였지.”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다문다. 나는 그 고요를 틈타 그녀를 바라본다. 말보다 정확한 눈빛, 눈빛보다 더 솔직한 마음. 이제는 더 이상 돌려 말할 수 없다.


나는 몸을 살짝 그녀 쪽으로 기울인다. 그녀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인다. 고개가 느릿이 기울어지고, 내 입술이 조심스레 그녀의 입술에 닿는다.


조금 경직된 어깨, 차가운 손끝. 그 위로 내 손이 조심스레 덮인다.


나는 안다.

이 조심스러운 긴장이, 곧 풀릴 거란 걸.

그녀의 마음이, 지금 열리고 있다는 걸.

keyword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