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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과 단풍

2월의 여름, 시드니 - 7.

by jcobwhy

2003년 3월.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수고하셨습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가방에 책과 노트를 마구 집어넣고 교실을 박차고 나온다. 수업은 끝났고, 다음 시간도 없다. 그럼에도 마음이 급하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발걸음, 몸이 먼저 반응한다.


수선관 복도에는 벌써 인파가 몰려 있다. 학생들은 밀려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계단 쪽으로 몸을 튼다. 몇 걸음에 하나씩 건너뛰며 칠 층에서 오 층까지 쿵쿵 계단을 내려온다. 뛰다시피 도착한 오 층 현관. 수업을 끝낸 학생들과 다음 수업을 향해 들어오는 학생들로 엇갈리는 복도 한가운데, 나는 옆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관리사무소 옆에 덩그러니 놓인 공중전화기. 바로 저기다.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오래된 기계. 누가 이걸 쓰겠냐고 묻는다면, 나다.


휴대폰이 생활의 기본이 된 이 시대에, 나는 이 전화기에 매달려 있다. 지금 여기 없지만 나를 기다릴 그 사람에게 닿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 그것이 바로 이 오래된 기계다.


나는 숨을 고르며 수화기를 들고, 주머니에서 국제전화카드를 꺼낸다. 조금은 낡은 플라스틱 카드 한 장. 그 위에 적힌 숫자들은 마치 오래된 열쇠 같았다. 그녀의 시간에 닿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조합. 손끝으로 숫자를 누르기 시작한다.


플라스틱 전화기의 버튼은 투박하지만 손에 익었다. 국제전화 카드에 적힌 숫자들을 눌러댄다. 자동 응답음이 들리자 기다릴 것도 없이, 이어지는 긴 숫자 행렬을 한숨에 눌러간다. 그녀에게 닿기 위한, 긴 여정의 시작이다.


뚜— 뚜—


호주의 휴대전화 신호음은 서울과 다르다. 짧고, 빠르다. 그 짧은 울림 사이로 나의 기다림이 덧없이 끼어든다. 열두 번을 넘게 울려도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늘 그랬다. 한 번에 바로 받는 법이 없다. 그것조차 익숙하다.


'여보세요?'

'자기야, 나야.'


짧은 숨이 섞인 인사. 이 목소리를 듣기 위해 오늘도 나는 뛰어내려왔고, 일련의 숫자들을 눌러댔고, 이제 겨우 하루가 열린다.


벌써 3월.


4학년의 첫 학기, 그 시작을 하루 앞둔 지난 2월 28일, 나는 그녀를 시드니에 남겨둔 채 귀국했다. 그녀는 공항에 나오지 않았다. 너무 드라마틱한 이별은 싫다며. 하지만 그 말은, 오히려 더 긴 작별처럼 느껴졌다.


다시 시작한 연애. 이젠 10시간짜리 비행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안아야 한다.


시드니와 서울은 거리만큼이나 모든 게 다르다. 다행히 시차는 거의 없다. 하루에 한 시간쯤 앞서는 그녀의 하늘 아래, 그녀의 하루가 나보다 먼저 열린다.


하지만 그 외에는 겹치는 것이 없다. 그녀의 하늘은 남반구. 나의 하늘은 북반구. 북두칠성을 잊은 그녀, 남십자성을 본 적 없는 나. 단 하나, 오리온자리만이 두 하늘을 가로질러 존재한다.


얼음이 녹아내린 길가, 개나리가 옹벽을 타고 피기 시작한다. 서울의 3월은 그렇게, 봄을 시작한다. 수선관을 지나며, 후문으로 향하는 도로변엔 벚꽃이 봉오리를 맺는다. 화사하지만 아직 만개는 아니다. 그 시작점에서 흔들리는 꽃잎들처럼, 나도 어딘가 불안정하다.


그녀의 시드니엔 이제 바람이 분다. 아직은 가을의 초입, 하지만 바람 사이로 다른 리듬이 들려온다. 여름이 너무 뜨거웠던 탓일까, 시드니의 가을은 유난히 선명하고 조용하다. 그녀와 함께 그 가을을 거닐 수 있었다면, 우리의 거리는 좀 더 가까워졌을까.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어학원 수업을 막 끝낸 듯, 밝고 생기 넘친다. 그 활기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


'나 친구들이랑 밥 먹으러 가야 돼.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익숙한 대사다. 하지만 그녀가 먼저 전화를 걸어온 적은 거의 없다.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나는 매번 기다린다. 오늘도, 아마 그럴 것이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조용히 숨을 고른다. 통화는 끝났지만 마음은 여전히 이어진 채다. 교차로 건너 수선관 현관을 나서며 햇살을 한 번 마주한다. 봄빛이 부드럽다. 잠시 눈을 감고 다시 걷는다.


비천당 옆 학군단사에 잠깐 들러 작은 박스를 챙긴다. 그 박스 안엔 지난 여행의 조각들이 조심스레 담겨 있다. 육백주년 기념관 1층 우체국 문을 밀고 들어서며, 나도 모르게 박스를 한 번 끌어안았다.


조심히 테이프를 벗겨 박스를 열었다. 먼저 꺼낸 건 시드니 공항 면세점에서 고른 스와치 시계. 은은한 분홍빛 가죽 스트랩이 그녀 손목 위에서 얼마나 예쁠까 상상하며 샀다. 그 옆엔 헬로키티 모양의 MP3 플레이어.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 수십 곡쯤은 담을 수 있는 128메가짜리다. 처음 데이트했을 때 그녀가 흥얼거리던 곡들을 꼭 담아두고 싶다. 마지막으로 나이키 코르테즈. 귀엽게 생긴 핑크 스우시 로고, 작은 사이즈.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온라인으로 주문한 신발이다. 어쩌면 호주 거리에서도 이 신발을 신고 나를 떠올릴까 싶어 고른 선물. 어쩐지 모든 색이 그녀 손끝을 닮았다. 환한 분홍, 장난스러운 핑크, 부드러운 살구빛까지.


물건들을 다시 정리해 담고, 박스를 닫는다. 모서리까지 빈틈없이 테이프를 감는다. 국제소포는 아무리 튼튼히 포장해도 모자라다. 그녀가 적어 보낸 새 자취집 주소를 박스 위에 또박또박 적는다.


내가 서울로 돌아온 직후, 그녀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했다. 낯선 도시에서 혼자 이사를 감당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큰일이다. 하지만 교포 친구들이 많이 도와줬다고 했다.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며 적응해 가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은 대견하고… 솔직히, 조금은 아리다. 내 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서.


소포를 건네며 비용을 지불한다. 도장을 ‘꾹’ 찍는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린다. 이제, 그녀 손에 닿기까지 며칠이 걸릴까. 그 며칠 동안 내 마음도 저 박스 안에서 함께 여행할 것이다.


우체국 문을 나서며 시계를 본다. 세 시를 넘었다. 서둘러야 한다. 네 시까지는 중학동 파스타집에 도착해야 한다. 나는 수선관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 달리듯 걷는다. 버스 시간이 촉박하다. 처음 해보는 아르바이트, 지각하고 싶지 않다.


시드니에 다녀온 뒤, 나는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여행 경비도 생각보다 컸지만, 문제는 지금부터다. 이제는 사랑에도 유지비가 필요하다. 국제전화카드를 사면 어느 정도 절약이 되긴 했지만, 한 달 평균 오만 원. 편지에 붙이는 우표, 소포에 드는 배송비까지 더하면, 나의 지출 목록은 그녀의 이름으로 채워져 갔다. 그 무게는 내 지갑보다 마음을 더 가볍게 만들었지만, 마냥 버틸 수는 없었다. 그녀를 향한 이 감정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나는 시간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허겁지겁 달려가 간신히 마을버스를 붙잡았다. 의자에 몸을 던지듯 털썩 앉아, 주머니 속 MP3를 꺼내 귀에 꽂는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멜로디가 흐른다. 경쾌하지만 어디선가 허전한 기운이 감도는 리듬. 봄기운에 눅눅하게 감긴 서울 오후와 묘하게 어울린다.


돌아와 줘, 멀지 않다면, 아직 나를 사랑한다면…


노랫말이 귓속을 파고든다. 그 말이 마치 내 안에 먼저 있었던 것처럼. 돌아와 달라는 말보다, 이대로 멀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다.


창밖을 보니, 벚꽃이 눈처럼 흩날린다. 삼청동길을 지나 안국동으로 향하는 이 샛길은, 매년 이맘때면 다른 세계처럼 느껴진다. 궁궐의 뒷담과 이어진 오르막길 위, 분홍빛 잎들이 바람을 타고 떠다닌다. 따뜻한 햇살과 부드러운 꽃잎, 그리고 이 정취를 함께 나눌 수 없다는 사실. 그게 오늘따라 못 견디게 아쉽다.


문득 생각한다. 우리는 왜 늘 여름에만 함께였을까. 삼 년 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나눈 계절은 늘 태양이 작열하던 때였다. 서울의 겨울은 그녀와 함께하지 못했고, 서울의 봄은 지금처럼, 내 곁에 없다. 그녀는, 새로운 가을의 공기 속에서, 붉게 물든 나뭇잎 아래, 낯설지만 점점 익숙해지는 사람들과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나는 봄으로, 그녀는 가을로. 우리는 다시, 서로의 반대편에서 계절을 걷는다.


그리고 나는 지금—봄의 서울 한복판에서, 혼자다. 하지만 아직은 괜찮다. 그녀의 계절이 끝나면, 언젠가 우리의 시간이 다시 올 테니까.


안국역에 도착하자마자 마을버스에서 허겁지겁 내렸다. 사거리를 가로질러 발걸음을 재촉하니, 골목 끄트머리에 자리한 파스타집 ‘한마당’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일보 사옥 바로 옆, 높은 건물 틈에 숨듯이 박혀 있는 이 작은 레스토랑은 도심 속에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몇 안 되는 곳이다. 간판조차 소박한 이곳은, 한때 이름난 이탈리안 셰프가 운영하던 전통 있는 레스토랑이었다고 한다.


'안녕하세요!'

'어, 왔어? 옷 갈아입고 밥부터 먹어.'


주방엔 셰프 두 명, 파티셰 한 명, 그리고 홀을 맡은 나. 총 네 명이서 이 작은 공간을 굴려간다. 셰프님은 이탈리아 유학파 출신답게 꽤나 정통한 요리를 내놓는다. 파스타의 풍미도 탁월했고, 크림소스의 균형도 훌륭했지만, 문제는 장소였다. 주차장이 없어 접근이 불편하고, 종로에서 살짝 밀려난 위치 탓에 영 손님이 찾질 않는다.


가끔 옆 건물 한국일보의 연예부 기자들이 모 스타와 인터뷰를 위해 찾아오기도 한다는데, 내가 본 건 고작 한두 명의 기자뿐. 연예인은커녕 텅 빈 테이블이 더 익숙했다.


옷을 갈아입은 뒤, 한쪽 구석에 있는 가게 전화를 집어 들었다. 수화기를 귀에 대고, 국제전화카드 번호를 눌렀다.


뚜우, 뚜우…


익숙한 신호음. 하지만 오늘도 그녀는 받지 않는다. 손끝에 걸린 침묵이 조금씩 무게를 늘려간다.


'뭐 해? 어서 와서 밥 먹어!'

'네, 셰프!'


아무렇지 않은 척, 수화기를 내려놓고 주방으로 향했다. 뜨거운 기름 냄새와 파르르 끓는 토마토소스의 향이 공기를 메운다. 손은 바쁘고, 주문은 뜸하다.


그녀와의 통화는 어느새 '되면 좋고, 안 돼도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끊긴 신호음이 쌓인다. 처음엔 실망, 그다음은 아쉬움. 그리고 점점, 아무 감정도 들지 않는 날들이 찾아온다. 연결되지 않는 전화가 말없이 남긴 균열이, 어쩌면 가장 무서운 거리감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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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