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여름, 시드니 - 1.
‘나랑 같이 가자.’
‘응?’
달콤한 그녀의 제안이 시끄러운 호프집 음악과 주변 사람들의 대화 소음을 뚫고 들린다. 귀를 의심한다. 오늘 들으리라 생각한 이야기가 아니다.
기대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헤어진 지 이 년이나 지났다. 이제는 가끔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웃으며 지난 일을 떠올리고, 왜 그랬을까 부끄러워도 했다가, 또 왜 그랬냐며 호통도 쳤다가, 그리고는 그렇게 쿨하게 돌아설 참이었다.
그래서 뜬금없이 만나고 싶다는 친구의 전언에, 아무렇지 않게 나가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같이 호주에 가자니, 제정신인가?
그녀와 헤어진 뒤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풋내기 대학 신입생을 지나 어느덧 대학교 3학년을 마무리했다. 그 사이 ROTC에 입단해 힘겨운 1년 차 후보생 생활도 마쳤다. 한때는 문자 한 통에도 잠 못 이루던 내가, 이제는 ROTC 유니폼을 입고 후배들을 이끄는 위치에 있다. 감정도, 사랑도, 조금은 어른스럽게 다룰 줄 알게 되었다고 믿었다. 더 이상 풋내기가 아니라고 자부했다.
그래서 그녀 앞에서 어깨를 펴고 앉을 수 있었다. 그런데, 단 네 글자. ‘같이 가자’는 그 말이, 방금 전까지 내 안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자부심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나, 방학이면 훈련 들어가잖아.’
'그래?'
못내 아쉬워하는 투다. 괜스레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훈련 끝나고 나면 한 달 정도 방학이 남긴 해.’
‘그럼 그때 같이 가면 되겠네.’
잠깐. 같이 호주에 가자는 제안 자체가 말이 되는 건가? 훈련 때문에 ‘못’ 간다는 핑계를 대는 것도 웃기다. 둘이 지금 무슨 사이라고. 사실 이유 따위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여지를 준다니. 한심한 노릇이다.
ROTC라도 해외에 못 가는 건 아니다. ‘친척 방문’ 정도의 그럴듯한 사유만 있으면 가능하다. 마침 호주 시드니엔 이모가 계신다. 서류 절차는 복잡하지만, 내가 뭐 벌써 군인인가? 솔직히, 호주엔 한 번쯤 가보고 싶긴 했다.
… 아니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 년 만에 나타나서는 같이 호주에 가자고? 왜? 왜? 괘씸하다. 당당하게 말해야지.
‘일단 알아볼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냐.’
뭐라는 거야. 어서 관심 없다고 말하라고! 왜 ‘알아보겠다’고 해? 알아보긴 뭘 알아봐!
‘그러던가.’
별 관심 없는 듯한 그녀의 대답이 더 자극적이다. 헷갈린다. 그녀는 정말 함께 가고 싶은 걸까? 본심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요란한 김태원의 일렉 기타 솔로와 함께 끝없이 올라가는 이승철의 보컬이 울려 퍼지는 호프집. 당황한 얼굴을 감추듯, 맥주를 급히 들이켰다.
지하철 역 개찰구에서 그녀가 표를 넣고 대합실 쪽으로 걸어간다. 그때도 그랬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심장이 요동친다.
이 년 만의 만남. 그동안 지나친 여자친구만 몇 명인가. 더 불같이 사랑하고, 더 뜨겁게 눈물 흘리며 그리워했던 사람들도 있었으니, 이 친구쯤은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얼굴을 보니 좋더라.
고작 스물둘. 며칠 후면 스물셋. 이 정도 나이면 옛사랑과 마주쳐도, 함께 웃으며 추억을 나누고, 맥주 한 잔으로 날려 보내고는 쿨하게 돌아설 수 있는 나이가 아닌가? 얘기하는 내내 실제로 그랬다. 어리석었던 어린 날을 추억하며 웃었다. 즐거웠다. 그녀가 그 말을 뱉기 전까진.
‘나랑 같이 가자.’
아직 어떤 이성과도 1박 2일 여행조차 가본 적 없는데, 그녀는 해외에서 한 달을 함께하자는 제안을 했다.
‘나 정착할 수 있게 도와주면 되지. 같이 여행도 다니고.’
‘일단 알아볼게.’
이 년 만에 만나서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해도 모자랄 판에, 정색을 하기는커녕, ‘알아보겠다’고 대답했다. 하, 참. 등신 같다.
그녀를 역까지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국민은행 앞을 지난다. 좁은 인도 위엔 대선 유세 자원봉사자들이 팻말을 들고 시끄럽게 구호를 외친다.
‘곧 크리스마스인데, 대선 분위기밖에 없네. 작년엔 크리스마스 분위기 좋았는데.’
딱 일 년 전이 떠오른다. 언제나 붐비는 성신여대 앞. 그날도 사람들로 가득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인 국민은행 앞을 여자친구와 웃으며 지나던 중, 맞은편에서 낯익은 얼굴이 다가온다.
그녀였다.
눈이 마주치고, 나는 얼어붙었다. 상체는 꼿꼿하게 굳고, 팔짱 낀 여자친구에게 이끌려 발만 겨우 움직인다.
마치 슬로비디오처럼, 그녀가 옆을 스쳐 지난다. 어깨가 나란히 될 때까지 시선을 거둘 수 없다. 그녀는 마치 바람난 남편을 목격한 아내처럼, 경멸 어린 눈빛을 남기고 지나간다.
‘왜?’
이유는 모른다. 옆에 여자가 있어서? 걷어찬 건 너였잖아.
그런데 일 년이 지나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눈빛. 질투였을까, 미련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내 착각이었을까.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미친.’
아무 의미 없는 생각이다. 일 년 전 그 눈빛 따위 떠올릴 겨를이 없다. 오늘 그녀의 ‘같이 가자’는 말 하나로 이미 정신이 탈탈 털린 상태인데.
일단… 알아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