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혜화동 - 6.
사방이 트인 구조라 그런지, 주말도 아닌 평일 오후에도 사람들의 시선은 쉽게 흐른다. 유난히 바깥보다 더 더운 것 같은 실내 공기. 에어컨 소리는 들리지만, 열기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햇살은 없지만, 시선이 더 따갑다. 테이블엔 점점 말라가는 복숭아 아이스티 한 잔이 놓여 있다.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있다.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제발, 이러지 말자, 자기야.'
무릎이 저리다. 바닥에 닿을 때 들렸던 마찰음이 머릿속을 울린다. 시멘트 바닥 위 카펫 아래의 딱딱함이 그대로 전해진다.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이 셔츠 안에 얼룩진다. 무거운 공기와 침묵. 마치 숨소리조차 튈까 조심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고개 대신 양손이 움직인다. 종이컵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천천히 돌리며,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문다. 손등에 힘이 들어가면서도, 손끝은 오히려 불안하게 떨린다.
가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는 듯하다가도, 금세 시선을 돌린다. 그녀의 눈빛엔 피로와 불편함이 얼룩진다. 얼굴 근육이 살짝 굳고, 입꼬리와 미간이 번갈아 일그러졌다 펴진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귓가에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리. 감정을 눌러 담은 듯한 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주인공을 향하지 않는다. 다만 커피잔 옆에 놓인 물컵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돌리고 있을 뿐이다. 코스터 위로 흘러나온 물자국은 점점 원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너 아니면 안 돼. 너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카페의 다른 테이블들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작게 피식거리는 웃음소리도 들려오는 듯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잠시 올려다본다. 그리고는 다시 시선을 내려, 종이컵을 감싼 손에 힘을 준다. 컵이 미세하게 찌그러진다.
'여기서 이러지 마.'
말의 끝에는 당혹스러움과 서운함이 동시에 묻어난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는다.
'싫어. 너 마음이 바뀔 때까지는 못 일어나.'
그녀는 조용히 숨을 들이쉰다. 길게 내쉬며 눈을 감는다. 다시 컵을 집었다 놓기를 반복하다, 의자에 깊이 기대어 허리를 편다. 말없이 고개를 젓는다.
'이런다고 내가 감동할 거라 생각해?'
'감동받으라는 게 아냐. 그냥... 난 네가 전부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
그녀의 눈썹이 잠깐 흔들린다. 감정이 요동치지만 말로는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 작은 한숨을 내쉰다. 그 사이 커피 머신의 증기 소리가 멀리서 퍼지고, 누군가는 일어나며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린다. 여전히 사람들은 그들 주변을 스쳐 지나간다.
'너를 위해서, 너 만을 위해서 난 세상 모든 걸 다 안겨주진 못하지만.'
카페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익숙한 멜로디다.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살짝 들어 스피커 쪽을 바라본다.
'난 너에게만 이제 약속할게. 오직 너를 위한 내가 될게.'
그래, 저게 바로 내 마음이라고, 너를 위해서 내가 이렇게까지 한다고. 참 좋아하는 곡인데, 지금의 내 마음을 대변하는 이만한 곡이 없다. 가슴이 울컥한다. 마치 이 노래가 지금 이 상황을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 감정이 땀보다 더 진하게 스며든다.
무릎은 이미 감각이 없다. 마비된 듯 저리다. 자세를 바꾸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주인공은 마음속으로 되뇌인다. 이 고통조차 너를 향한 내 마음이라고.
'이기적이야. 너.'
그녀의 말. 차분하지만 묵직하다.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인다. 알고 있다. 모든 말이 맞다는 걸. 이 순간조차 스스로를 위해 감정을 퍼붓고 있다는 걸.
그녀가 고개를 든다. 잠시 카페 주변을 둘러본다. 다른 테이블의 시선과 눈을 마주치고는, 무표정하게 다시 고개를 떨군다. 손등으로 이마를 쓸어 넘긴다. 그 손을 다시 테이블 중앙에 내려놓는다.
'…좋아. 일어나.'
'...응?'
'안 헤어질 테니까 일어나라고.'
고개를 든다. 그녀는 여전히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믿기지 않는 듯 눈동자를 몇 번 깜빡인 후,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정말?'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린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다리가 풀려 휘청대며 테이블을 짚는다. 숨을 깊게 들이쉰 뒤, 어색하게 웃는다.
'다리… 아프다.'
그녀가 피식 웃는다.
'그러니까 왜 그랬어.'
짧고 조용한 웃음. 창밖을 보며 머리를 넘긴다. 그 시선은, 아주 조금 부드러워졌다.
카페를 나설 때까지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학로의 인파 속을 함께 걸어간다. 주인공은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잡는다.
그녀는 살짝 놀라듯 눈을 깜빡이지만, 손을 뿌리치지 않는다. 오히려 손가락 사이를 맞잡는다.
나란히 걷는 걸음, 혜화역 계단을 내려갈 때까지 이어졌다. 지하철이 도착하는 소리에 몸이 움찔한다. 그녀가 타려는 문 앞에 섰을 때, 주인공은 마지막으로 그녀의 손을 꼭 붙잡는다.
그 손을 통해 전하고 싶었다.
지금,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그리고 이기적일 정도로 널 간절하게 원하고 있다는 걸.
2001년, 12월.
늦은 저녁의 돈암동 국민은행 앞엔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거리에는 아기 예수의 탄생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풍요로움만을 숭상하는 듯한 네온사인과 가짜 크리스마스트리가 휘황찬란하다. 사람들의 얼굴엔 물질의 축복이 가득 내린 듯, 희망이 가득한 모습이다.
여자친구와 함께 해리포터를 보러 가기 위해 성신여대입구 역을 향하고 있었다. 수많은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헤치며 찬바람에 목도리를 조여 매며 걷던 중, 그녀와 마주쳤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다. 그녀는 동성의 친구와 함께였다.
그녀의 눈이 커지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렀다. 그 눈빛 위로 스친 감정은 놀람도, 반가움도 아닌 기묘한 일그러짐이었다. 마치 벌레를 본 듯한 표정.
나는, 어쩐지 숨이 턱 막혔다. 차인 건 나인데, 왜 너의 표정이 일그러지니.
나는 무릎을 꿇었고, 그녀는 결국 날 외면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나를 경멸하는 듯한 표정을 한 채 지나쳤다.
뒤돌아보지 않고 걷는 그녀의 뒷모습. 의아한 듯한 표정의 여자친구가 웃으며 묻는다.
'왜? 아는 사람이야?'
나는 잠시 숨을 내쉰 뒤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도 아냐.'
정말 아무도 아닌 것처럼. 이제는, 그래야 할 것 같다.
Fin.
* 그동안 <그 여름, 혜화동>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연재 브런치북은 단편 모음집입니다. 다음 주부터는 <2월의 여름 시드니>를 연재합니다. 계속 많은 사랑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