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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시 Sep 29. 2023

미국에서 가정보육을 선택하다

아기, 한국어, 성공적 (아직까지는)

    출산 당시, 나는 직장에서 12주의 무급 출산휴가를 받았다. 다시 출근할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결정을 해야 했다. 다시 출근할지, 그만둘지.


    코로나 상황이 점점 심해져만 갔다. 여름이 되면 없어질 거라 했는데, 아니었다. 더 악화됐다. 확진자가 속출하며. 휴원하는 데이케어(어린이집)가 많아졌다. 등록을 해도 한 달에 몇 번이나 등원할지 몰랐다.


    당시 미국은 마스크 착용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아, 마스크 쓴 사람이 드물었다. 전염 위험성이 높아 보였다. 데이케어 자리가 난다 해도 아기를 보내기 무서웠다.


    무엇보다, 미국의 무상교육은 만 5세부터다. 우리 동네에서 영아의 데이케어 종일반 비용은 한화로 한 달에 백만 원이 넘는다. 만일 직장에 복귀한다면, 나는 적지 않은 보육비를 내고, 코로나 감염의 불안도 무겁게 짊어지며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다.


    내가 과연 그것을 원하는가?


    답은 "아니다"였다.


    퇴사 직전에 내가 쓴 일기를 찾아보니, 당시의 심정이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직장을 그만둬야 할 것 같다. 마음이 너무 섭섭하다. 언제 다시 직장생활을 할 수 있을까. 3년 후, 5년 후……? 이곳에서 2년간 직장생활을 하며 겨우 현지 생활에 적응해간다 싶었는데, 이민 초기처럼 다시 집에만 틀어박혀 사는 삶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원점으로 회귀한다. 이번에는 아기와 함께라는 것이 다를 뿐. 앞으로 어떻게 될까. 너무 힘들 것 같아 겁이 난다. 내 마음이 어떻게 버틸지. 내 몸이 어떻게 변할지가 걱정된다.”


    나는 결국 약국에 사표를 제출했다. 부국장님으로부터 너무 아쉽다고, 잘 지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확실한 결론이 났다. 그에 마음이 탁 놓이기도, 슬프기도 했다.


    그 무렵, 나는 친한 직장 동료들에게 문자메시지로 아기 사진을 보냈다. 다시 그들을 만나면 출산과 육아 얘기로 수다 한 마당을 펼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게 되어 아쉬웠다. 아기 사진을 보여주면 흔히 나오는, 영어권 사용자들이 뭔가 몹시 귀여운 걸 봤을 때 쓰는 감탄사인 “어우어 Awww” 소리도 육성으로는 들을 수 없었다. 문자 메시지에 쓴 글자로만 보고 목소리를 상상했다. 참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만나서 다행이었다. 한편 우리가 이렇게 친근하게 연락하고 지내는 일도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아무리 친했던 동료들이라 해도, 퇴사하고 나면 시간이 지날수록 굳이 연락해서 대화하기가 어색하다는 걸 여러 번 겪었으니까. 이제껏 미국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 중 가장 오랫동안 즐겁게 이야기하고 지내던 사람들이었는데, 쓸쓸하고 서글펐다. 이민자인 나로서는 쉽게 얻을 수 없는, 친밀한 사회적 관계였는데.


    훗날 재취업하면 또 다른 사람들을 사귈 기회가 있겠지. 직장이 아니어도 아기가 학교에 다니게 되면, 아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으니 다른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오겠지,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미국의 사립 보육 비용은 어릴수록 비싸다. 극도로 높은 비용의 영아 보육 기간이 지나면, 만 2세가 된 아기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재취업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우리 아기가 만 2세 때 코로나 상황도 크게 나아졌고, 마스크 착용도 여기저기서 해제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도서관 스토리타임이나, 음악교실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해졌다.


    그래도 나는 가정보육을 계속하는 것을 선택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만 꼽자면, 아기의 한국어 때문이었다. 나는 아기가 내게서 한국어를 흡수하기 바란다. 아기가 나뿐만 아니라 우리 부모님과, 우리 언니와 한국어로 소통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어학 공부가 아닌, 삶의 한 부분으로서 한국어가 자리 잡기를 꿈꾼다.


    따라서 나는, 미국에서 자랄 내 아이를 한국어에만 하루 8시간 이상 노출시킬 수 있는 유일한 그 시기를 놓칠 수 없었다. 아기를 보육기관에 한 번 보내고 나면 영어 노출량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서, 엄마 한 사람만 사용하는 언어인 한국어에는 집중하기 힘들어진다. 이왕 가정보육을 하게 된 것, 취학 전까지는 아이에게 한국어를 최대한 들려주고자 마음먹었다.


    출산한 날부터, 나는 아기에게 한국어로 끊임없이 말했다. 내 목소리로 한국어 동요를 매일 불러 주었다. 목이 아프면 CD를 틀었다. 한국어 중고서적을 대량으로 사 와서 읽어 주었다. 아기는 26개월에 영어와 한국어, 두 언어로 문장이 트였다. 나는 아기가 한국어를 쓸 때만 대답하고 반응했다. 나의 노력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현재까지는 보상을 받고 있다. 만 3세인 내 아이는, 나와 한국말로 대화한다. 날마다 아이의 한국어 표현이 다양해진다.


    아이가 미국 학교에 들어가면 급속도로 한국어를 잊을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미국에 살기에 어쩔 수 없겠지만, 나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처음 가정보육을 결심할 당시 목표는 이뤘고, 내가 직장을 그만둔 의미도 찾았다. 아기가 자유롭게 말하는 한국어를 들으며 보상받고 있다. 아직 가정보육 중인 나는, 오늘도 아기와 한국말로 대화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쁘다.


"엄마 주머니에 내가 나무 열매를 꼭꼭 숨겨 놓았어."

"이 상자에 깡총깡총 아기 토끼가 들어 있어."


    의태어의 사용이 명랑한 노랫소리처럼 들린다. 만약 영어로 들었다면 그 감동의 무게는 조금 달랐을 것이다. 아이가 성인이 되어 독립하기 전에 함께 하는 시간들 중, 내가 아이에게서 이처럼 아름다운 문장들을 한국어로 들은 날이 있음에 감사한다. 그게 마침 오늘임에 행복하고, 내일도 아마 그럴 것임을 알기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가정보육을 하면 아기가 성장하는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변화는 갑자기 온다. 하루하루 차곡차곡 쌓다가 어느 날 쑥 올라온다. 내가 아기 옆에 하루종일 붙어 있었던 덕분에, 아기가 처음 뒤집고, 앉고, 기고, 일어서고, 걷고, 생애 첫 단어를 말하는 모습을 전부 봤다. 기적처럼 모두 내 눈앞에서 일어났다.


    모든 순간이 감격스러웠지만, 특히 아기가 처음 혼자 앉았을 때가 기억에 남는다. 생후 7개월의 어느 날, 아기가 며칠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무릎을 땅에 대더니, 드디어 엎드린 상태에서 자세를 바꿔 혼자 앉았다!


    나는 환호하며 웃다가 울컥 감정이 올라와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아기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만졌다.


“슬퍼서 우는 게 아니야. 너무 행복하면 눈물이 나올 수 있어. 나는 우리 아기가 너무 멋지고 자랑스러워."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로 말하는 나에게 아기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진짜라니까.




    미국에서 가정보육을 하면 놀라울 정도로 규칙적인 하루 일과를 보낼 수 있다. 특히 우리 동네처럼 작고 심심한 곳에서는.


    나는 어릴 때부터 생활계획표를 짜 놓고 그대로 실천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어딜 가거나 누굴 만나야 하고, 항상 변수가 있었다. 그랬던 내가 여기서 가정보육을 하며, 짜 놓은 일과시간 그대로 생활을 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전후 30분가량 오차가 있다지만, 하루하루가 붙여 넣기 한 것처럼 똑같다.


    누굴 만나러 외출을 안 하고, 나가도 별로 갈만한 데가 없으니,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이가 낮잠을 건너뛴 적이 한 손에 꼽을 정도다. 특히 처음 1년간은 수유, 이유식, 간식 시간이 매일 똑같았다. 칸트의 삶을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엄마 입장에서는 지루한 환경이지만, 생각해 보면 강아지 뜬장처럼 두렵고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랐던 어린 시절의 내가 애타게 원했던 것이 이것이었다. 내일이 어떨지 예측 가능한 하루하루. 규칙이 있고 평화로운 시간. 안전한 느낌. 그런 것이 어린아이에게 생명과도 같은 가치임을 이제야 마음으로 깨닫는다.


    삶이 일찍이 내게 주지 못했던 안정을 한꺼번에 퍼 올려 이제야 쏟아부어 주는 것 같다. 인생 구간별로 균등하게 나눠 줬어도 참 좋았을 텐데. 하기야 내 맘대로 다 되면 인생이 아니겠지. 내 아기는 안정감 속에 폭 안겨 자랄 수 있어 다행이다.


    아기는 매 끼 잘 먹고 잘 자니 쑥쑥 잘도 큰다. 편안해 보인다. 보육기관에 안 가고 집에서 뛰어노니, 두 돌까지 감기 한 번 걸린 적이 없다. 미국 집은 단독 주택이 기본이라, 아기가 날고 기고 뛰어도 층간소음 걱정은 없다.


    집에서 놀다 질리면 우리는 대문을 열고 나가 잔디밭에서 잡초꽃을 찾아다닌다. "엄마, 생일 축하해." 한참 열중하던 아이가 조그만 토끼풀꽃다발을 불쑥 내민다. 아이 덕분에 매일매일이 내 생일이다. 나는 꽃줄기들 중 하나로 답례 꽃반지를 만들어 아이 손가락에 끼워준다. 그런 기분 좋은 평화가 이어진다. 아이에게는 결코 나쁘지 않은 가정보육이었다.




    미국 가정보육으로 얻은 부분과 장점을 앞에서 길게 써 내렸지만, 사실 나에게는 쉽지 않았다. 퇴사 직전 일기에서 걱정했던 대로, 내 마음이, 내 몸이 많이 변했다. 육아 우울증으로 심리 상담을 받으며 일 년 넘게 항우울제를 먹었다. 수면부족과 피로에 찌들고 활동량이 확 줄어든 내 몸은, 아픈 곳이 많아졌다. 단단했던 근육도 빠지고 체형도 변했다.


    사회적으로 고립되기도 했다. 직장생활도 안 하고, 아기를 두고 혼자 외출할 수가 없으니 여기서 그동안 사귀었던 인간관계가 다 끊어졌다. 나의 가족들, 어릴 때부터 봐 온 내 소중한 친구들은 모두 한국에 있다. 시차가 14시간이라 미안해서 메신저로 대화도 자주 하기 어렵다.


    주 양육자 입장에서, 가정보육은 신체, 정신, 인간관계가 1~2년 안에 무너졌던 충격적인 기간이었다. 하지만 가정보육을 안 하고 보육기관에 맡겼어도 나는 코로나 감염, 아기의 한국어 등으로 매일 걱정을 했을 것 같다. 이러나저러나 괴로웠을 것인데, 내 성격을 고려해서 가장 걱정의 양이 덜할 선택을 한 것 같다.


    가정보육 기간 중에, 나의 적성과 진로에 대해 다시 고민해 보기도 했다. 특히 육아 우울증 상담 과정 중에 나 자신에 대한 탐구를 많이 했다. 글쓰기에 대한 열정을 찾은 것도 그즈음에 일어난 일이다. 그래서 출산휴가 끝나고 직장으로 돌아갈 걸, 하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는다. 내가 가정보육을 선택함에 대한 후회는 아직 없다.


    다만 남들에게 해보라고 추천은 못 하겠다. 각자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찾아 선택하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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