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한 TV 프로그램 “사과나무”에서 전한 암 한자의 감동 깊은 사연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무렵 나도 암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서옥경 씨는 열 살과 일곱 살 아들, 다섯 살배기 딸과 동갑내기 남편을 남겨 두고, 서른세 살 나이로 저 세상으로 떠났다. 그녀는 지난 오 년 동안 출산과 병치레로 남편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 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유방암 말기 환자의 어려운 상황에서 TV 프로그램을 통해서라도 남편에게 의미 있는 생일상을 차려 주고자 했다. 병원 간호사는 그녀를 찾는 방송 진행자에게 병실 호수를 알려주며, ‘항상 웃는 분, 분홍색 머리띠를 한 분이라면서 쉽게 찾을 것’이라 말했다. 서옥경의 표정에서는 말기 암환자의 어둔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흰 호스 두 개가 박힌 등부위를 소독하는 간호사에게, “내가 며칠 병원에 안 오면 왜 내 남편에 대해 궁금해 해? 걱정돼서 빨리 못 가겠네” 하며 장난스레 시비 걸었다. 간호사는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하고 응수한다. 암울한 죽음 앞에서 느끼는 극한의 고통을 그녀는 그렇게 극복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날 보면 힘들까 봐요, 나한테 무슨 위로의 말을 해줄까, 고민하는 것도 같고. 나 한 사람만 참고 웃으면 여러 사람들이 편하잖아요."
눕거나 엎드리지 못한 채 진통제를 맞으며 고통으로 밤을 지새우는 그녀였다.
시댁 허락을 받지 못해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십 년을 살았단다. 알뜰하게 모아 전셋집을 얻고, 또 모아서 살림살이 장만하고 그러다 집을 샀다. 그 과정이 ‘하나도 고생스럽지 않았고, 신랑하고 재미있고 좋았다’ 말했다. 집 사고 난 뒤 자신이 암에 걸린 사실을 알았다. 자기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방송 진행자를 보고 서옥경은, “왜 저보다 많이 우세요? 제 남편도 아니면서…”라는 말로 분위기를 밝게 반전시켜버렸다.
남편을 아이들과 함께 눈썰매장에 보낸 뒤, 진행자를 시켜 미역국을 끓이려 했다. ‘제가 입은 살아 있거든요’하면서 이것저것 시키고는 국이 끓자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나 국의 간을 봤다. 저녁이 되어 아이들과 함께 들어온 남편은 풍성한 생일상에 깜짝 놀랐다. ‘내가 못해 주던 것 한꺼번에 모아서 해주는 거’라면서 울먹이는 아내를 남편은 ‘뭐가 미안해’라 말하며 안아 주었다. 방송사 프로그램을 통한 것이었지만 서경옥은 미역국 생일상차림으로 남편 사랑을 표현했다. 그녀는 방송이 나간 지 보름 되던 날 일산 국립 암센터에서 그녀의 길지 않은 삶을 마감했다.
우리 동네에 깨끗한 검진 병원이 생겼다는 이웃 말을 듣고 그곳에서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아내가 검사실 앞 모니터로 진행 상황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주먹만 한 혹이 지나가더란다. 옆에 있던 간호사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보고 뭔가 잘못된 게 있구나 싶었단다. 아내는 내시경 사진을 독촉해서 받아 바로 대장암 수술 전문 외과 의사에게 달려갔다. 의사 권고대로 나는 바로 입원하여 그 주에 오른쪽 결장 제거 수술을 받았다. 대장암 3기 판정 후 나는 30주 동안 항암 치료를 받았다. 그 뒤에도 부작용이 만만찮은 알약을 몇 달 동안 먹어야 했다. 수술받을 당시 대장암 3기 생존율은 40~60%라고 들었다. ‘나는 어느 쪽 확률에 들어 가 있는 것일까?’라는 혼자 물었던 게 기억난다.
내가 대장암 수술을 받았던 달, 호주 출신 찰리 벡은 맥도널드 역사상 최연소 CEO로 승진하는 기록을 세웠다. 열다섯 살에 점원 아르바이트생으로 그의 경력을 시작하여 19세에 점포 매니저, 29세에 호주 맥도널드 이사회 이사, 43세에 회사 CEO가 되는 초고속 승진자가 되었다. CEO 취임 한 달 만에 그는 대암장 진단을 받았다. 집중 치료에도 불구하고 6개월 뒤 그는 세상을 떠야 했다. 그의 혈관에는 맥도널드에 케첩이 흐른다는 농담을 할 정도로 맥도널드의 인스턴트 음식을 자주 먹었다. 그게 그의 죽음의 원인일 수 있다고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우리는 물리적 시간의 흐름 속에 산다. 이 시간은 크로노스 (chronus), 즉 양적인 시간이다.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이런 단위 시간 길이는 누구에게나 늘 일정하다. 서옥경은 크로노스 시간 33년을 보냈다. 죽음 앞에서 암 전이 이전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그녀는 생애 마지막 단계에서 질적인 시간, 카이로스(Kairos)를 붙들었다. 카이로스란 적기에 붙잡는 기회이다. 서옥경은 남편과 함께 하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다하기 전 사랑의 기억을 완성하는 카이로스를 놓치지 않았다.
대장암 위험에서 벗어났다 싶었을 때 이번에는 신장의 요산 수치가 높아졌다. 신장내과 의사는, “오른쪽 결장 제거 환자의 신장에 결석이 생기기 쉽다 했다. 신장투석받으며 살고 싶지 않으면 식이요법 잘하라”며 내게 겁을 줬다. 곧바로 아내는 내 몸속에서 어떤 병 유발 요인이라도 제거하고 말겠다는 투사가 되었다. 삼시 세끼 식단 관리를 하며 남편을 이른바 삼식이로 만들었다. 매일 출근할 때 도시락을 건네주며 ‘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라’는 잔소리를 빼놓지 않는다.
서옥경의 미역국 사랑을 상기해보면, 챙겨줄 때 잘 받아먹는 것이 나의 카이로스인 듯하다. 시간의 흐름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