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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선택을 우리는 어디까지 존중할 수 있을까?

당신은 영혜를 이해할 수 있는가?

by 기록습관쟁이

한강의 장편소설 <채식주의자>는 그 질문에서 시작한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세 개의 장으로 나뉜 이 소설은 주인공 영혜를 중심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남편, 형부, 언니의 시선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소설의 첫 장, <채식주의자>는 평범했던 영혜의 남편의 관점에서 시작된다. 직장인 남편은 어느 날 밤, 영혜의 기이한 행동을 목격한다. 깊은 새벽, 냉장고 문을 열고 한참을 바라보던 아내. 그날 이후 영혜는 고기를 거부하고, 철저히 채식만을 고집한다. 남편은 처음엔 그녀의 변화를 의아해했지만, 곧 무심히 받아들이는 척하며 일상을 이어간다. 하지만 채식주의자가 된 영혜는 점점 말라가고, 남편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결국 그녀의 친정에 고민을 공유한다.


영혜의 부모님은 딸의 채식을 '문제'로 규정하고 이를 강압적으로 해결하려 든다. 한 장면이 특히 강렬하다. 아버지가 고기를 억지로 그녀의 입에 넣으려 하고, 결국 그녀는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이 장면은 단순히 채식을 둘러싼 갈등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개개인의 자율성과 정체성이 어떻게 억압당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영혜의 아버지는 다혈질적인 폭력과 억압의 상징으로, 어쩌면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짓눌러왔던 상처의 근원일지도 모른다.


두 번째 장, <몽고반점>에서는 영혜의 형부 시점으로 이야기가 이어지며 더욱 파격적이고 불편한 전개가 펼쳐진다. 형부는 한 예술가로서 영혜의 몸에 새겨진 몽고반점에서 영감을 받는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단순한 예술적 탐구를 넘어선 금지된 욕망과 뒤엉켜 있다. 그는 영혜를 '사람'이 아닌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다. 그의 예술 행위는 창작을 빙자한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다. 영혜는 점점 자신을 둘러싼 틀을 벗어나고자 하지만, 형부의 욕망이 그녀를 또 다른 억압 속으로 몰아넣는다. 몽고반점은 단순한 신체적 특징이 아니라 그녀의 내면에 억눌려 있는 욕망과 고통, 그리고 개인적 저항의 흔적으로 상징된다. 그녀는 이 과정에서 점차 인간적인 모습과 사회적 규범에서 멀어져 자신만의 세계로 향한다.


세 번째 장, <나무 불꽃>은 영혜의 언니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언니는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영혜의 변화를 진심으로 이해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녀 역시 세상의 시선과 자신의 책임감에 얽매여 있다. 영혜를 돌보는 동안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본다. 결혼 생활과 사회적 역할에 짓눌린 자신과, 이 모든 것을 거부하고 나무가 되기를 꿈꾸는 영혜를 비교하며 그녀는 혼란과 해방 사이에서 방황한다. 영혜의 선택은 인간 사회에서 도망치는 행위가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구원에 가깝다. 그녀가 꿈꾸는 나무는 고요하고 뿌리 깊은 존재. 억압받지 않는 완전한 자유의 상징이다. 하지만 영혜의 자유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녀를 '구해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언니는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 결과, 영혜의 선택을 바라보는 언니의 시선은 연민과 안타까움, 그리고 죄책감으로 뒤엉킨다.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묻는다. 개인의 선택과 자유는 어디까지 존중받을 수 있는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어쩌면 스스로 울타리를 세우고, 그 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혜는 어릴 적부터 부모의 핍박과 억압 속에서, 혹은 스스로 그 틀을 순응하며 살아왔지만, 어느 순간 그 모든 억압에서 해방되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은 주변 사람들에게 비상식적이고 파괴적으로 보였다.


문득 나는 생각했다. 나조차도 영혜의 행동을 처음엔 이상하고 낯설게 느꼈다. 결국, 나 역시 내가 만든 울타리 안에 갇혀 갇힌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로 영혜의 남편처럼. 사실, 우리 대부분은 영혜의 부모나 언니, 혹은 처남처럼 그녀의 선택을 쉽게 규정짓고 판단하려 들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게 정말 정답일까?


우리는 영혜의 행동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고,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만큼 그녀의 변화는 기존의 틀을 뒤흔들 만큼 파격적이고 불편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단순히 영혜 개인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진 사고의 틀과 그 틀을 넘어선 존재의 가능성을 묻는, 깊고 도발적인 질문인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자유란 책임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했다. 영혜의 선택은 자유를 향한 갈망이지만, 그 자유는 주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책임의 무게를 안겨준다. 이 소설은 우리가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질문한다.

<채식주의자>는 그렇게 독자들에게 묻는다. 영혜의 행동을 진정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는 여전히 갇힌 사고 속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나는 책을 읽은, 혹은 읽으려 하는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은 영혜의 선택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녀는 자유를 찾아간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파괴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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