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사는 놈'이 지나온 시간
대학생이 된 나는, 고삐 풀린 망아지였다.
"나는 오늘만 사는 놈이다!"
영화 아저씨 속 현빈의 대사처럼 살고 싶었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문제는 나는 원빈이 아니었다. 특수부대 출신도 아니고, 전당포도 없고, 비상금조차 없는 평범한 청춘일 뿐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1학기가 끝나 있었다. 딱히 한 일도 없는데 시간만 흘렀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곧장 휴학계를 냈고, 병무청으로 달려가 입영 신청을 했다. 그렇게 도망치듯 들어간 군대는 내게 첫 번째 쉼표 같은 시간이었다.
2년 뒤, 제대한 나는 다시 복학을 준비했다. 하지만 학기까지는 반년이나 남아 있었다.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아 친구와 함께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겨울방학 시즌이었고, 특수학교에서 보조교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선생님이 꿈인 또래 학생들, 다정한 교직원들, 그리고 나처럼 이력서 한 줄 채우기 위해 왔을 법한 사람들까지 다양한 이들이 섞여 있었다.
그중 나보다 한 살 많은 형이 있었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형은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 중이었다.
"넌 요즘 뭐하냐?"
"아직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럼 나랑 같이 일할래?"
레스토랑이라고?
내게 레스토랑은 아주 멀고 비싼 세계였다. 샹들리에에 은은한 재즈, 넓은 테이블과 와인잔이 어울리는 공간. 쉽게 발 들일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이상하게 끌렸다. 나도 뭔가 해보고 싶었던 참이었고, 그래서 흔쾌히 수락했다.
해운대 해수욕장 맞은편, 커다란 빌딩 1층에 레스토랑이 있었다. 엔티크한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웃음을 머금은 직원이 환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어서오세요. 몇 분이세요?"
"아르바이트 면접 보러 왔습니다."
손님맞이도, 공간도, 조명도 낯설고 새로운 세상이었다. 직원들의 태도엔 자연스러운 친절함이 배어 있었고, 메뉴는 전혀 생소한 것들이었다. 이곳은 인도 요리 전문점이었다. 탄두에서 구운 양고기 바비큐, 각종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 커리, 부드러운 난, 샤프론이 들어간 인도식 쌀밥... 이름도 생소했지만 향은 묘하게 매혹적이었다.
무엇보다 손님 대부분이 외국인이었다. 와인과 맥주만을 파는 이곳에서는 '콜키지'라는 개념도 처음 접했다. 손님이 직접 가져온 와인을 개봉해주는 대신, 5만 원을 받는 방식. 문화의 차이를 이렇게 체감한 건 처음이었다. 계산도 각자 했다. 반면 한국 손님들은 함께 먹고, 함께 계산했다.
주방에는 인도인 셰프 셋, 설거지를 도맡은 이모 한 분이 계셨다. 처음엔 낯설고 무뚝뚝해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고 말이 통하자 금세 가까워졌다. 가끔 인도식 커리를 나눠 먹을 때면, 마치 여행자라도 된 듯 기분이 들떴다.
몇 달 후, 사장님이 내게 정직원을 제안했다. 서울 본점 외에도 여러 지점을 운영하는 분이었다. 나는 젊은 혈기와 호기심으로 제안을 수락했고, 그렇게 1년간 정직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곳의 시스템은 독특했다. 지배인, 캡틴, 인도 매니저와 인도 셰프들, 그리고 우리 같은 아르바이트생들이 함께 일했다. 특히 인도 매니저와는 나이 차이를 잊고 친하게 지냈다. 젊은 감각을 가진 그 덕분에 퇴근 후 맛집 탐방이나 술자리를 자주 함께 했다. 물론 계산은 항상 그가 했다. 나는 여전히 가난한 알바생이었으니까.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인도는 '카스트'라는 신분제가 있었다. 인도 매니저는 높은 계급이었고, 셰프들은 그보다 아래 계급.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지만, 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위계가 존재했다. 매니저가 무거운 짐을 들면 자연스럽게 주방장이 그것을 대신 들어주는 모습. 익숙하고 당연한 듯한 그 풍경이 낯설고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어느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을 평생직장 삼을 수 있을까?'
일은 즐거웠고, 사람들도 좋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지배인은 생활비에 허덕였고, 캡틴은 결혼 준비에 한숨이 깊었다. 정직원이 되어도 처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 역시 언젠가 생계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1년 만에 퇴사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돌아보면 학교는 내게 도피처 같은 곳이었다. 부모에게서 독립하지 못한 캥거루족처럼, 나는 졸업하지 못한 채 학교 근처를 맴도는 니트족에 가까웠다. 하고 싶은 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한 곳에 안주하기도 싫었던, 참 애매하고 못난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 덕분에 나는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고, 그 경험들이 지금 이렇게 글로 살아나고 있다. 인생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당신의 과거도 곱씹어보면, 언젠가의 실패가 오늘의 이야깃거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쓰라린 시간도, 지나고 나면 맛있는 안줏거리가 된다.
아니면 나처럼 그냥 글로 써보면 된다. 그렇게, 조금씩 내 안의 이야기가 자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