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영하 30도에서 30분을 버티다

힘들었던 그때의 내가 지금을 버틴다

by 기록습관쟁이

백사장에서 치킨을 팔던 아르바이트는 오래가지 못했다. 체력적으로도 너무 힘들었고, 매일같이 내리쬐는 햇볕과 전쟁하듯 싸우다 보니 일주일도 안 되어 포기하고 말았다.


다시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마침 아이스크림 공장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늘 지나다니던 길가, 8층짜리 건물이 공장이라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워낙에 바쁜 시즌이라 학생 아르바이트생이 많았고, 간단한 면접만 보고 바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 배정된 곳은 1층 창고. 각 층에서 포장된 아이스크림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내려오면, 그걸 받아서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설명을 듣는 내내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긴 왜 이렇게 추운 거지?”


창고 안의 온도는 영하 30도였다. 도무지 사람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대기실에는 북극 탐험가가 입을 법한 두꺼운 외투들이 걸려 있었고, 30분씩 돌아가며 교대하는 시스템이었다. 처음 냉동창고에 들어간 날, 눈썹이 하얗게 얼었다. 콧물은 흐르고 손끝은 마비됐다. 한여름에 얼어 죽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미끄러운 바닥 위에서 아이스크림 박스를 나르다 보면 자주 넘어졌고, 여러 겹으로 쌓아둔 박스가 우르르 무너지는 일도 빈번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선배 형들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야, 그렇게 못 들어서 언제 끝내냐?”


그 형들은 방학 때마다 이 공장에 오는 ‘고인물’들이었다. 어깨로 박스를 밀고, 팔로 두 개 세 개씩 집어 나르며, 심지어 여유롭게 장난까지 쳤다. 나는 그 형들 앞에서 매번 지적당하고, 실수하고, 허둥댔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혼나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오기가 생겼던 것 같다. 내심 나도 저들처럼 능숙하게 일하고 싶었다. 처음엔 얼어붙은 몸과 자존심이 가장 힘들었지만, 한 달이 지나자 냉동창고의 차가움도, 형들의 눈총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이제 좀 할만해졌다 싶었는데... 관리자가 나를 다음 공정으로 올려 보냈다.


이번엔 트럭 출고장에서 ‘까대기’를 하는 자리였다. 한 마디로, 쉴 틈 없이 쏟아져 내려오는 아이스크림 박스를 트럭에 빠르게 실어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두 명이 트럭에 들어가 박스를 받아 한쪽부터 차곡차곡 쌓아야 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엄청난 노동이었다.


특히 팔 힘이 약했던 나는 두 개도 겨우 들었고, 자꾸 박스를 흘리기 일쑤였다. 나와 함께 일하던 형은 엄청난 속도로 박스를 날랐고, 나는 그 리듬을 따라가지 못해 자꾸 흐름을 깨트렸다. 이 작업은 워낙 힘들어서 아르바이트생들 사이에서도 기피 대상 1순위였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자진해서 손을 들었다가 낭패를 본 셈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물러설 수 없었다. 하루하루 악으로 버텼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요령도 생겼고, 어느 순간 세 박스 정도는 거뜬히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온몸에 땀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그만큼 일을 해냈다는 뿌듯함도 느껴졌다.


까대기를 어느 정도 마스터하자, 이번에도 또 다른 공정으로 옮겨졌다. 이번엔 포장 라인. 그동안 내가 옮기던 아이스크림이 실제로 어떻게 만들어지고 포장되는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1층의 거친 분위기와 달리 이곳은 훨씬 조용하고 질서정연했다. 또 남자들만 가득했던 이전과 달리, 이곳은 대부분 여자 아르바이트생들이 일하고 있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였고, 때론 말도 걸고, 웃기도 했다. 처음엔 부끄럽고 어색했지만, 조금씩 대화가 오가자 마음이 편해졌다.


포장 작업은 단순하지만 아주 정확한 반복을 요구했다. 아이스크림 5개씩 4줄을 정해진 박스에 맞게 담아야 하고, 무게를 재서 오차가 발생하면 다시 열어 확인해야 했다. 나는 실수를 자주 해서 혼났지만, 나름대로는 금방 적응했고, 옆 사람들과 농담도 나눌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겼다.


분위기도 좋았고, 일도 비교적 편해서 이 공정이 마음에 들었다. 놀고 있는 친구를 데려와 같이 일하기도 했는데, 함께 일하던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친구에게 관심을 보였고, 친구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첫 만남에 엔딩을 봤다. (못난 놈 같으니라고...) 돌아보면 풋풋하고 웃긴 장면이다. (사실 나도 여 알바 동생에게 대시했다가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그날 저녁 친구와 둘이서 코가 비틀어지도록 술을 마신 건 비밀이다.)


그렇게 이곳에 정이 들 무렵, 나는 또 다른 부서로 보내졌다. 이번엔 공장 최상층의 배합실이었다. 아이스크림의 원료가 혼합되고 맛이 결정되는, 말 그대로 이 공장의 핵심 부서였다.


이곳은 24시간 돌아가는 공간이라 관리자와 단 둘이 교대근무를 해야 했다. 조용했고, 어쩌면 적막했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었다. 늘 말수가 적은 관리자와 최소한의 말만 주고받으며, 재료를 나르고 배합기를 돌리고, 밤에는 외로움과 졸음과 싸웠다. 배합실에서 얻은 게 있다면 지게차 운전이 가능해졌다는 것 정도. 그 외에는 흐릿한 기억만 남았다.


그러던 중, 공장에 변화가 생겼다. 기존의 나이 많은 사장님 대신, 젊은 이사가 새로 부임했다. 알고 보니 사장님의 아들이었다. 그는 첫날부터 공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기존의 방식을 바꾸려 들었다. 관리자들은 불편해했고, 나 역시 그의 태도에 불만이 많았다. 그에겐 아무리 말해도 통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이제는 그만하자”


이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충분히 해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몸은 고되고, 밤낮없이 돌아가는 공장에서의 시간은 헛헛했지만, 그 안에서 나 자신이 제법 단단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무더운 여름날, 아이스크림 공장에서 보낸 그 몇 달은 나를 얼리고, 녹이고, 다시 다져 놓았다. (다음 해에도 알바를 하러 간 거는 안 비밀. 내가 고인물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인생 참 재밌다)


지금도 무언가 버겁고 두려울 때면,

영하 30도의 창고에서, 미끄러운 바닥을 땀으로 버티던 그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keyword
화, 목, 토 연재
이전 03화나는 공부 대신 땜질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