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훈련, 그리고 희망
롯데 자이언츠는 내게 공기 같은 존재였다. 태어나면서부터 함께였고, 떠나는 법을 배우지 못한 팀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야구를 접했고, TV 중계 화면 속 푸른 그라운드를 보며 열광했다. 야구글러브와 공을 사서 점심시간이면 팀 동료들과 캐치볼을 하며 잠시나마 프로 선수들의 기분을 내보기도 했다. 사회인 야구팀에서 활동하는 지인을 보며 부러워했지만, 선뜻 직접 야구팀에 가입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여러 현실적인 이유들이 있었지만, 어쨌든 거기까지였다. 나는 직접 뛰는 것보다 보는 야구를 훨씬 더 좋아했고, 롯데 팬으로서 야구를 즐기는 것에 만족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롯데에 대한 나의 애정은 길고 긴 암흑기 속에서 서서히 식어갔다. 2018년 즈음이었을까. 매년 반복되는 실망스러운 성적은 나를 지치게 했다. "이대호가 솔로 홈런을 쳐도 팀이 지는데 무슨 의미가 있냐"는 푸념이 절로 나왔다. TV로 중계 화면을 볼 때면 응원가보다 "저걸 못 잡아?", "투수 교체 안 하냐!"같은 욕설이 더 많이 튀어나왔다. 경기를 보는 시간은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닌 고통이 되어갔다. 결국 나는 결심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팀을 옮기자.
새로운 팀을 찾던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SSG 랜더스(구 SK 와이번스)의 김성근 감독이었다. 그는 SK를 왕조로 이끌었던 '야신'으로 불렸다. 솔직히 롯데 경기만 보던 내게 SK는 그저 강팀 중 하나였을 뿐,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의 승리를 향한 집념, 열망, 독기는 화면 너머로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손수들은 훈련으로 만들어진다"는 그의 확고한 철학은 당시 롯데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패배에 익숙해진 선수들의 무기력한 플레이에 질려있던 내게 김성근 감독의 카리스마는 엄청난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러던 즈음,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김성근 감독이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온다는 것이다. 나는 일절 고민하지 않고 한화 이글스를 택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김성근의 한화를 택한 셈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한화 이글스 역시 롯데 못지않은 암흑기를 보내고 있는 팀이었다. 심지어 '꼴성근(꼴찌 김성근)'이라는 비아냥까지 들리던 시기였다. 하지만 나는 믿었다. 김성근이라면 한화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김성근 감독은 부임하자마자 팀 재정비에 착수했다. 최하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팀을 환골탈태시키기 위해 기존의 틀을 깨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오랫동안 팀에 몸담았던 송진우, 정민철, 장종훈 등 다수 프랜차이즈 스타 코치들이 대거 이탈했다. 낯선 얼굴들로 코치진에 새롭게 구성되면서 확고부동한 김성근 체제가 만들어졌다. 그는 팀의 색깔을 바꾸기 위해 내부 반발까지 감수하는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시즌 시작 전 스프링 캠프에서 선수들은 엄청난 훈련량을 소화했다. 언론에서는 "김성근 감독의 지옥 훈련"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다. 선수들은 오전부터 밤늦게까지 그라운드에서 땀을 흘렸고, 연습경기에서는 연신 실책을 쏟아냈다. 스프링 캠프 연습경기 성적은 형편없었다. 김성근 감독은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주전급 선수들과 백업 멤버의 격차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팀의 리더인 감독의 고민은 시작되었다"는 언론의 분석은 정확했다.
김성근 감독은 선수들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훈련량을 요구했다. "죽지 않을 만큼 훈련시키겠다"는 그의 말은 단순히 허언이 아니었다. 선수들이 개인 훈련을 하고 싶어도 코치들이 먼저 지쳐서 집에 갈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선수들의 가슴 깊이 뿌리내린 패배의식을 뽑아내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이미 스프링 캠프에서 선수들과 감독, 코칭스태프까지 고생하는 사진들이 언론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훈련 중 선수들이 토하거나, 주저앉는 모습까지 공개됐다. 팬들은 이런 선수들의 처절한 모습을 지켜보며 대리 만족을 느꼈다. 나 또한 그랬다. 그들은 죽을 듯이 힘들고 괴로웠겠지만, 팬들에게는 일말의 희망을 보았을 테다.
주요 관계자들은 한화와 김성근 감독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전력은 기대 이하이고, 강팀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주전과 비주전의 격차가 커서 야구라는 장기 레이스에서 주요 멤버의 부상 이탈이 가장 큰 문제가 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심지어 "단 한 명이라도 부상으로 이탈한다면 시즌은 사실상 끝이라고 봐야 한다"는 비관적인 전망까지도 나왔다. 그럼에도 모두가 한 가지 희망을 품었다. 바로 김성근이라는 한 사람 때문이었다.
드디어 시즌이 시작됐다. 김성근 감독의 한화는 개막전부터 치열했다. 경기 내용은 단순히 144경기 중 하나가 아니었다. 매 경기, 매 승부가 한국 시리즈였다. '똥줄 타는 야구', '진이 빠지는 경기'라는 표현이 딱 맞았다. 작은 TV로 응원하는 나도 지칠 정도로 처절한 경기들이 많았다. 하지만 좋았다. 지난 몇 년간 절망적인 수준이었던 팀이 이렇게 물고 늘어지는 경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감격스러웠다. 3월, 4월. 한화는 2001년 이후 가장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드디어 재미있는 야구를 시작한 것이었다. 김성근이라는 사람이.
5월에도 4월과 마찬가지로 재미있는 경기들이 많았다. 물론 경기 초반을 책임질 선발 투수가 없어, 선발 투수가 교체되는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한화는 아득바득 따라잡았다. "선발 야구가 안 되면 불펜 야구로 간다"는 김성근 감독의 말처럼, 불펜 투수들이 연일 등판하며 1, 2점 차를 유지해 갔다. 재미있기도 했지만, 마음 편히 볼 순 없었다. 그래도 버텼다. 연승은 힘들었지만, 연패도 하지 않는 5할 승률을 유지하며 낭떠러지 앞에서 발걸음을 이어갔다.
하지만 6월이 되자 선수들은 눈에 띄게 지쳐갔다. 지는 경기들이 늘어났다. 설상가상으로 팀의 주축 선수 중 한 명이 도핑 테스트에서 양선 반응이 나왔고, 30경기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부상 선수들도 속출했다. 주전 포수 조인성은 발가락 골절로 이탈했고, 이용규, 김태균 등 주축 선수들도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렸다. 상위권을 유지했던 팀 성적은 점점 내려가기 시작했다. 피로 누적으로 인한 수비에서의 에러 역시 눈에 띄게 늘어났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혹사가 이어졌다. 지쳐 쓰러져가는 주축 선수들만 계속 기용되고, 이들의 체력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선수들은 휴식이 아닌 야간 특타 훈련에 매달려야 했다. 실수가 많은 날이면 더욱 강도 높은 훈련으로 이어졌다. 팬들에게도 이 모습은 '지옥' 같았다. 점점 볼멘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선수들 다 죽이겠다", "너무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김성근 감독에게는 내일이 없었다. 오늘 해야 할 일은 오늘 해야 했다. 오늘 실수는 오늘 만회해야 했다. 그는 해이해진 선수들의 정신력을 다잡으려고 노력했다. 야구에 더 집중하고 온전한 선수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오늘 실수하면 내일도 실수한다"는 그의 말은 지친 선수들에게는 채찍질이었지만, 그만의 확고한 철학이 담겨 있었다.
그는 현역 선수들보다 아니, 누구보다 야구에 대한 열정이 높았다.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팀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뒤따라오는 선수들이 지쳐 쓰러지려 해도 아랑곳없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꼴찌 팀의 정신력을 송두리째 뽑아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을 해보지 못한 선수들은 하나둘 쓰러져갔다. 선수 혹사 여파로 김성근 감독은 거세게 비판받았고, 팀 역시 점점 추락했다.
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누구보다 야구를 사랑하고 팀을 사랑하고 있었다. 팀이 이기는 날엔 환호하며 웃고, 지는 날엔 함께 안타까워 울었다. 선수가 부상을 당할 땐 내 일처럼 아파했고, 부상에서 돌아오면 쾌재를 불렀다. 비록 지더라도 상대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경기, 선수들의 투혼을 볼 수 있는 경기면 족했다. 팀의 승패마진에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이 팀을 사랑하고 있었다. 김성근 감독의 지옥 훈련과 논란 속에서도 나는 그 열정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결국 김성근의 한화는 아쉽게도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이후 프런트와의 갈등으로 인해 불명예 퇴진했다. '야신 김성근'이라는 그간의 명성에는 크게 금이 가 버렸다. 많은 이들이 그를 비판했고, 나 역시 아쉬움이 컸다.
하지만 83세의 그는 아직도 야구를 한다. 비록 '불꽃야구'라는 예능 스포츠이지만, 야구에 대한 그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없다. 그런 그의 마음을 따르는 선수 역시 많다. 한때 김성근 감독의 지도를 받았던 선수는 이렇게 고백했다.
"하루에는 스윙을 7천 개까지 한 적도 있고, 배팅만 9시간을 한 적이 있었다. 김성근 감독님 훈련은 시키는 거 전부 다 과한 훈련이었다. 타자는 공이 오면 반응하는데, 처음 느꼈던 게 내가 스윙을 하니까 공이 와서 맞는 느낌이었다. 김성근 감독님은 인생의 은인 같은 분이었고, 인생에서 터닝포인트였으며, 포기하지 않는 삶을 만들어주신 분이다."
그의 혹독한 훈련 방식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 그만큼 선수들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정신력을 단련시키는 데는 탁월했다. 그의 야구에 대한 순수한 열정, 그리고 선수들을 더 나은 선수로 만들고자 했던 진심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성근 감독은 내게 야구 그 자체였고, 야구의 깊이와 열정을 가르쳐준 최고의 야구인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가 걸었던 야구의 길을 기억하며 나의 야구를 사랑하고 있다.
(2025년 시즌 전반기 한화 이글스가 1위를 장식했다. 33년 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