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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동근 변호사 Jul 25. 2019

시에 관한 작은 단상

아주 오래전 한 시인이 귀한 언어를 발견했다. 그 언어는 사람들의 인식이 닿지 않은 무지의 세계로 모든 이를 안내했고, 그 누구도 접하지 않은 처녀의 몸을 많은 사람들에게 던져 주었다. 시간이 흐르자 그 언어는 더 이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아니 모든 사람들의 의식 속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가 스스로 귀족의 권자를 버리고 평균인들의 수다스러움에 동참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언어는 풍부해졌고, 시적 영감이 없는 사람들도 기본적인 은유를 통해 자신의 인식을 제법 설득력 있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일 수가 있고, 소녀의 웃음소리도 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한낮의 우울을 잠시 위로하다 지겨워지면 냉정하게 쓰레기처럼 던져 버릴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침반의 바늘은 뚜렷하게 한 곳을 가리킨다. 진폭은 점점 0으로 수렴하면서 선택의 여지는 줄어 나는 어떠한 목적을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실은 내가 그리로 가고 싶은 것이다. 그곳은 사람들이 허공이라고 했다. 아니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빈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인식할 수 없는 ‘무(無)’의 공간이다. 행성과 행성 사이, 별과 별 사이의 까만 공간이 아니라 우주의 끝을 넘어선, 도무지 공간이라고 할 수 없는 신만이 아는 휴식처를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환시키는 ‘짓’을 한다면 나는 프로메테우스일 수도 있고, 이브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일 수도 있다. 


"M의 작품들은 시가 일상 언어 사용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서 시가 아닌 것들과 스스로를 변별케 하는, 고유한 층위를 갖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보인다. 그 층위란 산문의 평지에서 좀 떠 있는 부력, 흔히들 말하는 시적 상상력에 의해 ‘새롭게 발견된’ 영역을 지칭하는 것인데, M에게는 그러한 발견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있을 때 시가 스스로 뜬다. 이런 좋은 부력이 있음에도 그것을 방해하는 좋지 않은 버릇이 M에게도 있다. 다분히 서술적인 말투라든가, 시라고 하는 대단히 인색한 지면에서 동어 반복하면서 낱말들을 낭비하는 것, 시적 상념이 더 깊은 데로 들어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것 등등이다."



어느 문예대회에서 한 심사위원이 남긴 평이다. 상투적인 평을 넘어서 시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을 세워주는 것 같다. 하지만 그도 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가 추구하는 시는 좋은 시가 될 수 있지만, 어떤 시가 그렇지 않다고 해서 좋지 않은 시가 된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평가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약간의 반항심 섞인 투정을 한다면 ‘그렇다면 당신의 시는 스스로가 제시한 기준을 위배하지 않는가’하고 묻고 싶기도 하다.

또 다른 시인은 수상소감만큼 상투적이고 설득력 없는 글도 없다고 했다. 평가하는 위치에 있으면 시의 절대적인 기준을 자신은 알고 있는 듯 ‘무(無)의 세계로 가려고 하는 자여! 이러이러한 글을 써라!’고 혁명가처럼 외칠 법도 한데, 그 시인은 오히려 평가받는 자가 부끄럽게 자신을 낮추고 있다. 그 누구도 좋은 시의 기준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진설성’만을 제시해주었다. 하지만 자신은 스스로가 제시한 기준에 부합하는 시를 쓰는 사람이고, 시는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자신감 섞인 어법을 구사하는 그 심사위원의 ‘훈계’는 경청할만하다. 실은 내가 추구하고 싶은 시, 내가 읽고 적지 않은 감동을 받는 시, 내가 쓰고 싶은 시가 바로 그가 좋은 시라고 말하는 그 시이기 때문이다. 한 폭의 회화가 생각나는 듯 참신한 직유, 은유 그리고 비유가 풍성하면서 본질을 추구하는 바가 의표를 찌르고, 군더더기 없는 아름다운 시.


그 시는 마치 드뷔시(Debussy)나 라벨(Ravel)의 피아노 곡과 흡사하다. 때로는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에 취한 요정이 나에게 튀긴 물방울처럼 신선하지만, 드뷔시의 ‘달빛’처럼 차분함을 잃지 않는다. 가끔은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권좌를 라벨이 물려받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쇼팽(Chopin)에게는 대단히 무례한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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