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도전기: 한양도성 순성길
동네 뒷산을 졸업하고 다른 산으로
앞서 말했듯이 부모님은 산을 참 좋아하신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산에 계속 끌려다녔다. 그래도 성인이 되고 나서는 가족 여행을 제외하고 끌려다니는 정도가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주말에 집에서 뒹굴거리던 나는 다시 부모님께 등산 제안을 받았다. 그 처음이 ‘한양도성 순성길’이다.
한양도성은 한마디로 조선의 도읍지인 한양을 방어하기 위한 성곽이고 4대문과 4소문이 있다. 한양도성 순성길은 이 성곽을 따라서 18.6km을 걷는 것이다. 걷고 나면 인증서와 소정의 기념품(!)을 제공한다. 스탬프는 앱을 이용하여 GPS 인식으로 찍을 수 있다더라(요즘 스탬프 투어는 완전 최신식이다).
어차피 주말에 맨날 잠만 자는 직장인 인생이므로 서울 구경 좀 다녀볼까 하여 반쯤 강제인 제안을 승낙했다. 5년 전에 주말에 맨날 집에서 잠만 자는 나를 위해 목표를 가져보자는 의미로 스탬프 투어를 검색하다 순성길 스탬프 투어를 찾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주말에 잠만 자는 건 똑같지만 이번에는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권투 체육관을 꾸준히 출석한 덕에 주말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체력이 좀 길러진 걸까? 이 순성길은 조선의 도읍지인 서울의 역사를 돌아보기에 정말 부담 없고 좋은 곳이지만 이 브런치스토리의 공간의 주제가 '운동'이기 때문에 순성길 코스 중 산으로 구성된 곳만을 다룬다. 안 그러면 이 글이 문화유산 탐방기로 빠질 수 있다. 실제로 글을 쓰다가 오래간만에 역사 덕후(일본어 오타쿠(御宅)를 한국식으로 발음한 ‘오덕후’의 줄임말로, 현재는 어떤 분야에 몰두해 전문가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기질이 발동하여 이 글이 역사 에세이가 될 뻔했으므로 제동을 걸고 다시 운동 에세이로 방향을 전환했다.
남산
남산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매우 친숙한 곳이고 많은 사람들이 서울 관광을 온다면 꼭 와본다. 나 역시 서울 관광으로 처음 남산에 와봤다. 그러고 보니 남'산'이다. 지금은 그냥 높은 공원의 느낌이지 산이라는 느낌이 많이 퇴색되었다. 버스로 거의 다 올라오고 마의 몇백 미터 오르막 아스팔트길을 도보로 간신히 올라오면 정상이다. 내려갈 때는 역시 버스를 타고 가거나 넓고 완만한 아스팔트길, 혹은 잘 정비되어 있는 계단으로 내려가면 된다. 나는 이런 현대 문명의 이기를 누리지 못하고 올라올 때는 버스로 올라왔지만 산길로 내려갔다. 그래도 명색이 ‘순성길’인데 성곽을 봐야 하지 않겠는가? 순간 남산이 ‘산’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낮은 산이라 경사가 가팔라서 운동화 신고 왔다간 까닥하면 미끄러질 뻔했다. 남산을 등산으로 간다면 만만하게 보지 말고 등산화는 신길 바란다. 잘되어있는 남산의 각종 길들을 생각하면 진짜 다칠 수 있다. 등산화는 밑창이 미끄럼을 방지해 주고 오래 걸어도 발이 덜 아프게 해 준다. 운동화로 산의 내리막을 내려오면 나 홀로 쭉쭉 미끄러져서 근처 등산객이 나에게 ‘괜찮으세요?’라고 걱정 어린 한 마디를 던지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또한 일반 운동화는 평길 10km을 걸으면 발바닥에 무리가 오지만 등산화는 산길 10km를 걸어도 발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괜히 등산하시는 분들이 등산화를 신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등산복은 적당히 운동복 아무거나 입고 오면 큰 상관은 없다. 단, 바지는 칠부나 긴바지를 입어야 한다. 풀독과 곤충 방지와 미끄러졌을 때 다리 보호 등을 위해서다. 여기에 기능성 모자와 가방, 스틱까지 하면 등산도 생각보다 장비빨이지만 그건 차차 알아보면 된다. 남산이나 동네 야산 정도면 등산화와 운동복만 있으면 충분하다.
낙산
낙산은 남산보다 ‘산’이라고 부르기 민망하다. 이름부터 낙산'공원'이다. 남산은 그래도 산의 형태가 남아있고 등산을 할 수 있지만 낙산은 그냥 높은 곳에 있는 공원에 가깝다. 나는 처음에 이곳이 산이 아닌 줄 알았다. 그래도 ‘산’이 들어간 곳답게 가는 길이 오르막이다. 어느 정도 기초체력은 있어야 걸어서 올라올 수 있는 곳이다. 여기는 남산과 다르게 성곽길이 공원 따라 있으므로 천천히 걸으면서 구경할만한 곳이다. 중간중간 볼 수 있는 각종 문화재는 덤이다. 남산과 다르게 성곽을 보기 위한 신발의 종류에 큰 제한이 없다.
인왕산
서울 구경 왔을 때 먼발치에서만 봤던 인왕산. 그곳을 처음 가보았다. 멀리서 보기만 해도 바위가 장난이 아닌데 실제로 가보면 예상대로 장난이 아니다. 그리고 서울 도심에 있다 보니 가족 단위로 등산을 많이 와서 등산로 교통 체증 현상이 생긴다.
백운산에서 낙오한 뒤로 제대로 된 첫 등산이었다. 가다 보니 생각보다 갈만했다! 교통 체증 때문에 빨리 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쉬면서 갈 수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처럼 보이는 아이들이 등산화를 신고 거의 앞질러서 뛰어간 뒤로 뒤에 쫓아오는 (죽을 표정인) 아빠를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것을 계속 볼 수 있다. 같은 직장인 입장에서 직장인 아빠에 감정이입이 됨과 동시에 저 애들은 어디서 저렇게 힘이 나서 산을 뛰어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애들도 등산화를 신길 정도로 산을 자주 오는 가족이라면 대단하다. 인왕산이 바위가 많아 미끄럼 위험이 있는 것을 알고 애들까지 등산화를 신기셨다니. 나도 어렸을 때 다른 분들이 보면 저런 가족의 구성원이었을까.
사람이 많고 계단이 엉망이라 올라오기 힘들었지만 결국 정상에 도달했다! 와 이것이 꾸준히 운동한 덕인가! 나 이제 많이 좋아졌구나? 꾸준한 줄넘기의 힘은 대단하다. 나는 청운공원 쪽으로 내려왔고 내려오는 길은 올라올 때보다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산은 내려오는 것에 훨씬 더 긴장을 해야 한다.
약 8개월 만의 등산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꾸준히 운동한 보람을 여기에서도 느꼈다!
북악산
이제 순성길의 마지막 산 코스인 북악산이다. 여기는 인왕산보다는 길 정비가 잘되어있다고 하여 좀 낫겠지 싶었지만 난이도는 낮지 않았다. 인왕산은 등산로가 몇 개 없어서 한 길로만 등산객이 몰리는 경향이 있으나 북악산은 등산로가 많아 인파가 분산되어 그나마 나았다. 나는 창의문 쪽에서 출발하여 약 500m를 계단으로 올라가고 와룡공원으로 내려왔다.
500m 계단은 올라갈 수는 있지만 내려올 수는 없을 정도로 가팔랐다. 심지어 난간이 없었다. 내려오시는 분들은 진짜 어떻게 내려오시는 건지.. 처음에 밑에서 무한한 계단을 보니 걱정이 앞섰지만 인왕산에서 확인한 향상된 나의 체력은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는 수준이 되었고 중간에 2, 3번만 쉬고 정상까지 올라갔다!
와 내가 이렇게 체력이 많이 늘었구나!! 물론 아직도 주말에 맨날 자지만 그건 그냥 의지박약이었던 걸로. 이제 산에서 낙오했던 나는 잊어버릴 정도로 나는 꽤 좋아졌다.
한양도성 순성길은 역사를 좋아하는 자칭 역사 덕후인 나에게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길이었고 인증서와 기념품 배지를 받고 체력 향상의 뿌듯함까지 다 얻어간, 말 그대로 성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