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북한산이다!
한양도성 순성길은 분기별로 다른 완주배지를 주고 4종류의 배지를 다 모아 오면 다른 배지를 준다. 이 점이 나의 수집욕을 자극하여 등산 메이트(=부모님)에게 4분기 배지를 다 모아보자고 했지만 칼같이 거절당했다. 거절당한 이유는 인왕산 등반이 힘들고 기타 등등. 아무래도 인왕산이 길이 좋지 않고 여름에 등반하기엔 그늘이 없는 땡볕이라 난이도가 높다. 그리고 굳이 그 산이 일 년에 4번 등반할 정도로 매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대신 다른 스탬프 투어를 제안하셨으니.. 그것은 서울 둘레길과 북한산 둘레길. 두 개를 같이 제안하신 것은 이 2개 스탬프 투어가 일부 구간이 겹쳐서 하다 보면 동시에 하게 된단다. 두 둘레길은 이미 유명한 동네 등산로를 코스로 편성하였기에 길이 훨씬 좋다고 하더라(이상 이런 스탬프 투어가 생기기 전부터 해당 코스를 다녔던 부모님의 말씀). 그렇게 나는 어차피 주말에 또 잠만 자는 인생이므로 반강제로 또 산에 끌려갔다. 북한산 둘레길이 서울 둘레길보다 절대적인 총거리가 짧기에 북한산 둘레길 완주부터 도전했다.
‘북한산’하면 매해 뉴스에 나오는 등산 사고들로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 같은 등산 초보가 넘볼만한 산이 아니라 생각했다. 알고 보니 사고가 나는 곳들은 북한산 정상을 가는 구간이고 둘레길은 난이도가 낮고 상대적으로 완만한 흙길로 거의 되어있었다. 그래서 등산 초보도 충분히 북한산을 갔다는 기분을 낼 수 있다.
여기는 순성길처럼 GPS를 이용하여 앱으로 스탬프를 찍지 않고 ‘스탬프 투어 패스포트’ 종이책자를 탐방 지원 센터에서 구입해야 한다. 스탬프는 지정된 곳에서 찍은 인증 사진을 탐방 지원 센터에 보여주면 직원이 확인 후 찍어주신다. 정직하게 구간을 걸어야만 받을 수 있는 구조이다. 총 21개 구간이고 총거리는 71.5km이다. 나는 아래 일정으로 걸었다.
1일 차: 도봉옛길(18구간), 방학동길(19구간), 왕실묘역길(20구간), 소나무숲길(1구간) - 총 10.9km
2일 차: 순례길(2구간), 흰구름길(3구간), 솔샘길(4구간), 명상길(5구간) - 총 10.9km
3일 차: 평창마을길(6구간), 옛성길(7구간), 구름정원길(8구간) - 총 12.9km
4일 차: 송추마을길(13구간), 우이령길(21구간) - 총 11.8km
5일 차: 마실길(9구간), 내시묘역길(10구간), 효자길(11구간), 충의길(12구간) - 총 12km
6일 차: 산너미길(14구간), 안골길(15구간), 보루길(16구간), 다락원길(17구간) - 총 11.4km
북한산 둘레길을 하루 만에 완주하는 산악마라톤이 있으나 나는 그 정도의 엄청난 체력은 아니기에 하루에 약 10km를 약 4~5시간 걸어서 완주했다. 산악마라톤의 1등이 한 시간에 10km 속도로 간다는 걸 고려하면 굉장히 느리다. 평길에서 10km를 1시간 만에 뛰는 것도 엄청난 것인데 산길을 1시간에 10km라.. 세상에는 정말 대단하신 분들이 많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나는 어디까지나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 것이므로 나의 속도에 맞추어서 진행했다. 북한산 국립공원에는 곳곳에 반드시 자기의 수준에 맞추어서 진행하라는 안내문구가 많이 붙어있다. 제일 인상 깊은 것은 ‘지금 멈추지 않으면 당신의 심장이 멈춥니다’였다. 얼마나 사고가 많이 나면 저렇게 무서운 경고를 붙여둘까. 뉴스에서 ‘북한산’을 등산 사고 보도로 많이 접할 수 있을 정도로 무리한 산행을 하다가 다치는 분들이 많다는 걸 각종 경고 문구들로 실감했다. 나는 정말 다행히 건강하게 산행을 마쳤다.
참고로 이 글을 읽고 계신 분이 등산을 시작한다면 동네에 작은 야산부터 등산화를 신고 도전하는 것을 권한다. 그리고 체중 감량을 목적으로 등산은 추천하지 않는다. 등산은 전적으로 체력싸움이므로 중간중간에 에너지바나 초콜릿 등으로 기력 보충을 해주어야 한다. 김밥 등을 사서 점심 먹을 때쯤에 산에서 먹는 것 역시 권한다. 생각보다 산에서 점심을 먹을 만한 곳(의자 등)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점심 먹을 때를 놓쳐서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아침을 오전 8시에 먹고 오후 3시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로 간신히 걸었던 끔찍한 경험을 한 뒤로 편의점이 보이면 점심거리를 산 뒤 괜찮은 자리가 나타나고 적당한 점심시간이 되면 반드시 먹고 간다. 아직도 강제 공복 산행을 한 구간이 기억난다. 왕실묘역길이었다. 너무 힘들어서 그냥 앞으로 가다 보니 산에 있는 연산군묘를 깜빡하고 지나쳐버렸다. 역사 덕후가 이런 역사 명소를 놓치다니. 아쉽지만 그때 너무 힘들어서 아무 식당이나 적당히 들어가서 먹고 싶었다. 하필 근처에 편의점도 계속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나의 경험담을 밑거름 삼아 반드시 편의점이 보이자마자 간식거리를 사길 강력 권한다. 도심처럼 편의점이 흔히 있는 곳이 아닐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 등산 시기도 매우 중요하다. 여름에는 추천하지 않는다. 북한 둘레길을 6월 말~7월 초에 갔을 때 속옷까지 땀범벅이 되어 정말 많이 힘들었다. 이때 앞에서 말한 ‘지금 멈추지 않으면 당신의 심장이 멈춥니다’를 보았다. 진짜 멈추고 싶었던 내 맘을 대변해 주는 문구였다. 여름에 가면 땀으로 인한 탈수를 방지하기 위해 물을 많이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도 문제다. 물은 1L에 1kg이다. 물을 약수터에서 뜨면 된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뭐 미리 약수터의 위치를 다 알고 가면 가능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약수터의 식수가 음용 적합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나도 이런 사실을 알고 싶지 않았다). 왜 사람들이 봄, 가을에 등산을 많이 가는지 생각해 보라. 다들 많이 가는 시기에는 이유가 있다.
이 둘레길이 좋았던 것은 등산이 아니었으면 갈 일이 전혀 없는 동네를 이곳저곳 갔다는 것이다. 서울을 꽤 많이 가봤다고 생각했으나 처음 가보는 곳들이 많았다. 구파발역이 북한산 등산객으로 북적인다는 것을 둘레길을 가면서 처음 알았다. 주말에 구파발역에서 북한산 등산로 입구로 가는 버스는 출퇴근길의 지옥버스 수준으로 사람이 많았다. 출퇴근길은 다들 가방을 작은 걸 갖고 타지만 등산객은 가방이 어마무시하게 커서 탑승 및 버스에서 버티기 난이도가 훨씬 높았다. 심지어 가을에는 단풍 구경을 하러 엄청난 인파가 북한산에 몰리기 때문에 구파발역에 아예 서지 않고 통과하는 경우가 꽤나 많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등산에 진심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나만해도 어렸을 때부터 맨날 끌려가면서 등산을 했으니 그렇게 산에 다니던 분들이 나이가 들어서도 산에 다니는 걸까.
또 다른 보람은 이제 등산이 덜 무서워졌다는 것이다. 산에서 낙오한 지, 그리고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약 1년 2개월 후에 나는 북한산 둘레길 완주증을 받았다.
그 결과가 완주증으로 증명되었다. 회사에서 주말에 한 일을 물어보았을 때 잡담거리로 둘레길을 간 이야기를 많이 했다. 어쩌다 보니 나는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의 이미지가 되어있었다. 퇴근하고 권투 체육관 다니는 사람, 점심시간에 맨날 운동 가기 싫다면서 수업 가는 사람, 주말마다 산에 가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