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종 14년 음력 11월 19일,
개혁의 상징이자 이상주의자였던 '조광조'는
유배지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나이, 불과 서른여덟이었습니다.
조광조는 조선 성리학의 이상을
현실 정치에 구현하고자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꿈꾼 나라는 도덕과 원칙이
정치의 중심이 되는 조선이었습니다.
중종의 신임을 받으며
그는 짧은 시간 동안 굵직한 개혁을 추진합니다.
학문과 인품으로 인재를 등용하는 '현량과'
'소격서'를 통해 미신적 도교의례를
국가 제도에서 배제했고, 지방사회 자치와
도덕질서 강화를 위해 향약을 보급했습니다.
이 개혁들은 모두 조선 사회를
한 단계 끌어올리려는 시도였지만,
동시에 기득권 세력에게는 위협이었습니다.
1519년, 훈구 대신들은 조광조를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로 몰아세웁니다.
결정적 계기는 이른바 ‘주초위왕(走肖爲王)’
나뭇잎에 쓰인 글자를 빌미로,
'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는 모함이 퍼졌습니다.
중종은 끝내 조광조를 지켜내지 못합니다.
조광조는 파직되고, 유배되었으며,
그해 12월 20일, 사약을 받습니다.
조광조의 정치 인생은 짧았지만,
그의 사상은 오래 남았습니다.
그가 남긴 것은 제도가 아니라 방향이었습니다.
정치는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신념,
권력보다 원칙이 앞서야 한다는 주장.
반면 조광조의 개혁은
성리학 이념에만 충실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함께 존재합니다.
조광조의 죽음은 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조선 개혁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 나무위키 '조광조' 발췌
https://namu.wiki/w/%EC%A1%B0%EA%B4%91%EC%A1%B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