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과 지갑사이
지난 크리스마스 며칠 전 저녁이었습니다.
저녁 식사 약속이 있어 길을 나섰고,
약속 장소 앞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고,
횡단보도 앞에는 나이 지긋해 보이는
취기가 오른 노동자 한 분이 서 계셨습니다.
작업복 차림이었고,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 건너편에는 우산을 든
젊은 여성이 한 명 서 있었습니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자,
그 여성이 갑자기 신이 난 듯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뛰어 나갔습니다.
노동자는 그 여성을 미처 알아보지 못한 듯했고,
둘은 횡단보도 중간쯤에서 마주쳤습니다.
그제야 알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부녀 사이였습니다.
여성은 웃으며 아빠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있었고,
비를 맞고 있던 노동자는 그제야
딸을 알아본 듯했습니다. 그는 '비 맞지 말라'며
딸을 처마 쪽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일을 마치고 동료들과
소주 한 잔 하는 길인 듯해 보였고,
딸은 집에 들어가는 길에
우연히 아빠를 만난 듯했습니다.
딸은 자꾸 우산을 아빠에게 씌워주며
집에 들어가자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장면이 유독 제 눈에 오래 남았습니다.
처마 밑으로 들어선 노동자는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지갑을 꺼냈습니다.
지갑을 펼치고 5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는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걸 딸에게 건네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신이 난 표정으로요.
딸은 그런 건 필요 없다며
손사래를 치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그냥 집에 가자'라고
아빠를 꼬드기고 있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용돈 때문인지,
그녀 표정은 더 밝아졌고 웃음도 더 커졌습니다.
그럼에도 끝내 그 돈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이 이미지가 너무 행복해 보여서
사진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장면을 끝으로 신호를 받아 자리를 떠났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자꾸 마음에 남았습니다.
저도 아이들이 이미 성인이 되었어도
여전히 어리게만 보이고,
집에 온다고 하면 괜히 마음이 먼저 분주해집니다.
“밥은 먹었을까.”
“춥진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을 알면서도
그 생각은 좀처럼 멈추지 않습니다.
그날 사거리에서 보았던
아버지의 주머니 속 5만 원 한 장은
아마 돈의 액수가 아니라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마음의 크기였을 겁니다.
받지 않겠다며 웃던 딸의 얼굴도,
그래도 꺼내 보이며 신이 난 아버지의 표정도
그저 오래 남는 연말 저녁의 풍경이 아닐까.
지갑을 들고 다니지 않는 저도
이제는 지갑을 들고 다녀볼까 생각하다가,
아이들이 멀리 살지.. 하는 헛헛함이 남았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서
잘 보이지 않게 된 풍경이 아니었을까.
그날 저녁,
선물 포장지보다 더 반짝이던 장면 하나가
제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이 글의 초안은 '음성 인식'으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