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벌거숭이가 왔다.
종이책 원고를 붙들고 퇴고에 매달린 지 어느덧 6개월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세 번째 퇴고를 진행 중이지만, 문장이 나아졌다는 확신은 좀처럼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칠수록 더 보이는 것들이 늘어납니다.
코칭을 해주시는 '사랑주니'님의 열정을 따라가다 보면, 머리카락이 한 올씩 희어지는 기분입니다. 그렇게 월요일 줌 미팅으로 1장에 대한 토의를 마쳤습니다. 아직 2장에서 4장까지 남아 있었지만, 그날은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이틀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 말은 곧, 이틀간의 짧은 휴가를 의미했습니다.
꿀처럼 달콤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이런 시간에 몇 달째 소식 없던 '천둥벌거숭이'(아들)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아빠, 저녁에 뭐 해요?"
이건 안부가 아닙니다. 밥을 사 내라는 뜻입니다.
결국 제 이틀짜리 휴가 중 하루는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흰머리 소년께서는 손주가 온다는 말에 저녁 내내 기다리셨습니다. 육류를 드시지 않는 분이기에, 집 앞 만두 맛집에서 만두전골을 포장해 왔습니다. 식탁을 거실로 옮기고, 편의점에서 소주와 맥주를 사 와 상을 차렸습니다.
그렇게 셋이 마주 앉았습니다.
누굴 닮았는지 웃음이 많은 녀석은 실없는 농담으로 할아버지를 웃게 만들고, 저는 그 모습을 보며 잔을 기울였습니다. 어느새 아들은 제법 어른이 되어 있었고, 이제는 지난 이야기들을 웃으며 꺼낼 수 있는 사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골프장 캐디로 일하며 버텨낸 시간들, 함께 지내고 있는 '공짜 딸'(천둥벌거숭이 애인) 과의 이야기들, 그리고 젊은 세대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생각까지.
어제 저녁은 그렇게 길게 이어졌습니다. 잠시 미뤄두었던 퇴고보다, 잠깐 빼앗긴 줄 알았던 휴가보다, 훨씬 더 유쾌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늘 시간을 아낀다고 애쓰며 살고 있지만 정작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대부분 그렇게 계획 없이 끼어든 시간들입니다.
요즘은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삶은 내가 지켜낸 시간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내어준 시간으로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천둥벌거숭이는 할아버지에게, 아빠에게 시간을 내어준 것이고,
저는 그 녀석에게 소중한 시간을 할애한 것이니까 그것으로 참 좋다 생각했습니다.
돈 많이 벌어서 '할아버지 좋은 거 사드릴게요'하는 녀석에게 한마디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