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과 이별
신경과학에 의하면 인간의 전전두엽이 성장을 마치는 시기는 평균 26에서 27살. 운전자 보험이 27살부터 저렴해지는 이유로 이런 배경을 들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만큼 성숙되지 않은 이들에게 생명과 직결된 운전에 있어서 엄중한 자격을 논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요즘 텔레비전을 보니 무면허 운전으로 사고를 낸 미성년자 이야기가 적지 않게 나온다. 타인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큰 사고를 볼 때면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으면서도 젊은 날의 치기가 가져오게 될 결과가 안타깝기도 하다. 더불어 이런 결과로 큰 짐을 짊어지게 된 사람들이 생겨난다. 누군가는 이들을 기억해 줬으면 한다.
내 오른팔에는 흉터가 하나 남아있다. 길게 남겨진 두 줄의 흉터. 이 흉터가 팔이 아닌 마음에 쓰라린 아픔을 남겨 주었다.
새로운 환자에 대한 처방 의뢰가 들어왔다. 나이는 이제 겨우 고등학생. 차트에 적힌 진단명은 사고에 의한 뇌 손상이었다. 그랬다. 오토바이 사고였다. 청소년기에 재활을 경험하게 될 중증 외상 환자의 대부분은 오토바이 사고 환자일 만큼 오토바이 사고는 치명적이다. 사망의 늪을 겨우 빠져나온다 할 지라도 평생 본인과 가족에게 큰 짐을 짊어지게 한다.
재활 센터를 새롭게 찾아온 환자는 마치 갓난아이가 된 듯한 모습으로 휠체어에 앉아 치료실로 들어왔다. 앳된 얼굴에 장난기 넘치는 표정을 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손과 발이 휠체어에 묶여 있었다. 보통 초기 섬망 증상 때문에 콧줄이나 목관을 뽑는 경우가 있어서 손을 묶어 놓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발까지 묶어 놓은 모습을 보고 조금 의아했다. 의아함도 잠시, 시간표를 잡고 치료를 시작하기 위해 손과 발을 푼 순간 치료라는 이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외상으로 인해 대뇌에 손상을 입으며 인지적 사고 능력에 문제가 생긴다. 더불어 감정 조절 능력을 다치는 경우엔 본인의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게 된다. 휠체어에서 침대까지 가기 위해선 적어도 치료사 2명에서 3명이 붙어야 했다. 제대로 움직이기 조차 힘든 팔다리를 휘저으며 난동을 부리는 통에 치료는커녕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 놓기 바빴다. 다행히 연차가 높은 선생님 시간의 치료에는 그럭저럭 치료가 이어졌지만 아직 경험도, 기술도 부족했던 당시의 나에겐 치료시간 30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았다. 항상 그 시간만 되면 땀을 뻘뻘 흘려야만 했다. 치료 시간이 끝나야 순간을 넘겼다는 안도감이 자리 잡을 정도였다.
다행히 며칠의 치료를 거듭하며 치료에 조금씩 진전을 보이는 듯했다. 조금씩 붙잡고 있는 시간보다는 치료시간이 늘어났다. 누운 채로만 진행하던 치료도 어느덧 앉는 자세까지 시도해볼 수 있었다. 며칠 동안 평온한 상태를 보이며 치료라는 전쟁도 끝나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만 치료가 진행되면 얼마나 좋았을까. 전쟁에서 승리한 후엔 신발 끈을 고쳐 묶으라 했던 말이 있다. 조금의 진전을 보였다면 더 신중했어야 한다. 조금 얌전해진 것만으로는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는 상황. 굳은 몸을 풀어 주기 위해 했던 스트레칭이 조금 아팠는지 잠시 잠잠해졌던 과격한 행동이 화산처럼 분출되었다. 말을 하기 힘들었던 입에선 육두문자의 모양이 보였고 팔다리는 어딘가로 향하기라도 하듯 힘차게 휘둘러졌다. 몸을 못 가누는 상황에서 이런 발버둥은 낙상으로 이어진다. 곧바로 팔다리를 잡아 제어해야 했다. 하지만 미쳐 놓쳐버린 손은 이미 내 팔을 휘감고 있었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분노를 차분히 가라 앉히길 반복하던 중 옆 테이블에서 한 마디 말이 건너왔다.
“선생님 팔에서 피나요...”
나의 팔을 휘감고 있던 환자의 손은 손톱의 날을 세워 내 살갗을 열심히 쥐어뜯는 중이었다. 몸부림을 잠재우느라 팔에서 피가 흐르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한 편의 전쟁영화를 찍던 와중에 옆에 계시던 선생님께서 이를 본 것이다.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치료는 이어져야 했다. 피가 흐르는 것도 내버려 두고 흔들고 있는 팔다리를 붙잡은 채 남은 치료를 이어갔다. 치료시간이 마쳐지고 나서야 발버둥 치는 환자를 휠체어에 태웠다. 환자를 보내고 한숨을 돌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피가 치료했던 테이블 한 귀퉁이를 적시고 있었다. 혈액은 오염물질, 다음 환자 치료 시간에 남겨져 있음 안 된다. 얼른 테이블을 소독하고 나서야 피로 얼룩진 팔뚝을 알코올 솜으로 닦아낼 수 있었다.
많이 따가웠다. 하필 당시 계절이 더운 여름이었다. 상처가 난 후에 팔에 흐르는 땀은 하루의 불쾌지수를 높여주는 주범이 되기도 했다. 일하다가 다칠 수도 있다지만 다른 사람에게 쥐어 뜯긴 상처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 뾰로통하게 짜증이라는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가뜩이나 힘든 시간인데 며칠 동안 쓰라린 상처까지 가져가야 한다니. 영 기분이 좋지 못했다. 이런저런 생각 속에 치료시간은 더 이상 ‘어떻게 치료할까’가 아닌 어떻게 ‘시간을 버텨내야 할까’를 고민하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휠체어를 타고 치료실로 들어오는 모습만 봐도 한숨이 나왔다. 더 이상 즐겁고 희망적인 이야기가 아닌 불편함이 가득한 적막만이 치료 테이블을 감쌌다. 당시의 나에겐 매일 돌아오는 그 시간이 너무도 힘들었다.
그렇게 치료가 이어지던 어느 날. 환자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치료실 조차 올라오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병실로 찾아가 치료를 진행해야 하는 상황. 그나마 휠체어와 테이블을 오고 가는 수고라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병실을 찾아갔다. 방에 도착해 보니 치료실에서 비치는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이상해하며 환자의 옆을 보았다. 항상 돌봐 주던 간병인이 아닌 다른 분이 계셨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찾아와 지극 정성으로 직접 간병을 시작하신 것이었다. 평소와 다른 따뜻함을 느낀 탓인지 환자도 훨씬 안정된 모습으로 누워 치료를 받았다. 역시 가족의 보살핌이 다르구나 생각 들만큼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그동안 치료시간에 너무 지쳐 있었다. 치료에 수용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놓기 충분했다. 어린 마음이지만 부모님께서 계속 간병하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나의 마음을 하늘도 알아준 것일까. 맞벌이를 하셨는지 번갈아 가며 간병을 시작하셨다. 치료 시간을 한결 편하게 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기뻤다.
하지만 왜 그때의 난 알지 못했을까 부모도 사람이라는 것을. 순조롭게 치료가 진행되고 있음에 만족함이 이어지던 어느 날, 치료 시간이 되어 병실로 향했다. 병실로 들어가기 직전 계속해서 보채는 아들에게 힘들었던 나머지 신세 한탄이 담긴 한마디가 나의 귀로 향했다.
“왜 타지 말라는 오토바이를 타다가 모든 고생은 부모에게 시키냐. 왜, 왜, 왜…..”
우연히 듣게 된 한마디에 한참을 멈춰 서있었다. 부끄러웠다. 나에게서 지나가기만 바라던 그 환자는 부모에게 있어선 평생 보살펴야 하는 아들이었다. 이제는 대화 한 마디 나누기 어려워진 자식을 보살펴야 하는 부모의 마음을 그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너무 사랑하지만 원망 섞인 불평 말고는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는 부모의 나지막한 절규였다. 이 처절한 음성을 듣고 나니 내 팔에 남겨진 상처는 쓰라림이 부끄러웠다. 조용히 옷으로 가리고 나서야 병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다른 병원으로 전원 가게 되었다. 퇴원하며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환자였지만 한동안 쓰라린 상처와 함께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은 한마디가 남겨져 있었다.
지금은 내가 말해주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흉터가 많이 옅어졌다. 바쁜 일상 때문에 흉터가 남겨져 있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리는 나날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옅어질지언정 사라지지 않은 흉터처럼 그 날의 기억도 옅어질 뿐 잊히지는 않을 것 같다. 내 가장 어린 치료사 시절, 부끄러움의 상징처럼 남겨진 팔의 흔적. 하늘이 내게 건네 준 초심의 상징이 되었다. 아직은 쓰라린 기억이지만 치료사를 마치는 날엔 흐뭇하게 바라볼 기억이 되기를 고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