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과 이별
기억의 회로는 놀랍도록 정교하다. 혹자는 인간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인즉슨 기억하려고만 한다면 반드시 어딘가에는 저장되어 있다는 이야기이다. 심지어 저장된 정보는 연결에 연결을 거듭해 더 큰 기억의 고리를 만들어 준다. 처음에는 버벅 거리며 어려워하던 것들도 학습만 된다면 배우지 못한 비슷한 부류의 것들까지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참으로 신비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익숙해진다. 익숙함은 능숙함을 선물한다. 능숙함이 바탕이 될 때 일도 사람도 쉬워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쉬워진다는 편안함. 가끔 나는 이 편리한 능력에 속는다.
나는 시간을 정말 잘 지키는 사람 같다. 그중에서도 어쩜 그리 끝나는 시간을 잘 맞추는지. 학창 시절부터 시작 시간은 몰라도 끝나는 시간만큼은 귀신같이 지켰던 것 같다. 아무래도 아침형 인간이다 보니 저절로 기상 시간 보다 잠드는 시간에 민감해졌다. 그래서일까, 대부분의 상황에서 정해져 있는 출발보다 정해져 있지 않은 끝맺음에 예민한 편이다. 치료시간도 시작은 조금 일찍 해줘도 끝내는 시간은 거의 지키는 편이다.
로봇 치료의 경우 끝내는 시간을 맞추지 않으면 다음 환자의 착용 시간이 늦어진다. 1, 2분에 세상 무너지듯 항의하는 보호자가 심심치 않게 나타나는 만큼 더욱이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로봇을 처음 다루는 초기엔 장비 하나, 하나가 어색하다 보니 시간을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시간을 재촉하는 은은한 압박의 눈빛은 꽤 오랜 시간 동안이나 나를 따라다녔다. 이런 불편한 공기 속에서도 시간이 흐르다 보니 어느덧 실력이 붙었다. 착용 순서부터 로봇을 장착하는 손의 감각까지 하나씩 익숙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시간도 조절 가능했다. 능숙함을 보여주는 만큼 보호자를 내편으로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점차 나를 믿어주는 환자와 보호자가 많아질수록 나 스스로 만족감에 충만해졌다.
그러던 중 새로운 환자의 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의욕이 넘치는 분이셨다. 비록 의욕에 비해 몸이 따라가 주지는 못했지만 누구보다 치료에 성실하게 임하셨다. 치료가 끝날 때가 되어서도 한 바퀴만 더 돌자며 나를 붙잡고는 하셨다. 다음 일정이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나에겐 크게 달갑지 않은 소리였다. 몇 번 정도는 더 돌고 싶다는 요구에 따라 주었다. 하지만 이런 요청이 계속되자 어느 순간 안 된다며 받아주지 않았다. 다음 환자에게 피해를 준다는 이유였다. 내 머릿속 스케줄대로 진행되어야 치료실이 원활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정확함이 나의 능숙함이라 생각했다.
환자 분께서는 단호한 거절에 다소 시무룩한 반응을 보이셨다. 사실 나는 거절 의사만 단호하게 밝히면 더 이상의 요구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 생각보다 환자 분의 열의가 강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항상 한 바퀴만 더 돌자며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원칙이라며 최대한 상냥하게 거절했지만 계속되는 요구에 조금씩 짜증이 밀려왔다. ‘아니, 안 된다고 하면 아닌 줄 알지 왜 계속 규칙을 어기려 할까’.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얼굴은 웃으면서 차분히 설명을 드렸다. 이런 실랑이가 매일 반복되던 어느 날 결국 내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 나왔다.
“어르신, 이렇게 규칙을 어기시면 다른 환자 분 전체가 피해를 받아요. 계속 똑같은 말씀 하시면 안 돼요.”
나의 어투가 조금 강해지자 이제는 정말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확실히 포기한 듯한 모습을 보이셨다. 이제는 더 이상 안쓰러운 마음도 없었다. 내가 대체 몇 번을 말씀드렸는지. 나 스스로도 많이 참았다고 생각하며 로봇을 풀어드렸다. 휠체어에 앉아서 정리를 하고 치료실을 나갈 채비를 하시는 환자의 떠나시는 모습도 뒤로 한 채 다른 로봇으로 향했다.
나는 대체 뭐가 그리 급했을까. 환자와 보호자에겐 시간에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고 이야기해놓고 나는 왜 급했던 걸까? 치료 마지막 날 나지막하게 건네신 한 마디가 내 나의 세계를 통째로 흔들어 놓았다.
“지금까지 젊은 친구에게 떼써서 미안해요.”
그야말로 프라이팬으로 뒤통수를 강하게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능숙하다는 자기 만족감에 취해 낫고 싶다는 절박함을 쳐다보지 않았다. 좋아지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의 마음을, 떼를 쓴고 있다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나는 말로만 삶을 살리는 물리치료사가 되고 싶다고 거창하게 말할 뿐, 결국 나의 편리함을 따지는 이기적인 놈이었다. 그 연세의 어르신께서 얼마나 낫고 싶으셨으면 손주 뻘 되는 치료사에게 떼를 쓴다는 기분까지 드셨던 걸까. 그때 그 순간만큼 나의 임상 생활에서 부끄러웠던 적이 없었다. 지금도 어르신과 비슷한 연배의 환자 분이 들어올 때면 나는 아직도 그 부끄러운 순간에 서있다.
‘익숙함에 속아 중요한 것을 잃지 말자’는 말이 한동안 유행한 적이 있다. 인간은 학습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망각의 존재이다. 한 가지를 얻음으로 한 가지를 잃고 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나는 익숙함 덕분에 간절함을 잃었다. 이런 나의 교만이 돌이킬 수 없는 부끄러움을 남겨 주었다. 가슴속에 사무치게 남은 부끄러움은 더 이상 나를 익숙함에 속지 않게 해 줄 안전띠가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나의 혈기왕성했던 어느 날. 미처 어루만져주지 못했던 환자의 마음을 나의 남은 치료사의 삶 동안 속죄하는 마음으로 갚으며 살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