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과 이별
심정지를 알리는 방송.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주기적으로 울리는 방송이지만 어딘가 낯설지 않은 장소를 알린다. 살려낸 생명에 새로운 삶을 불어넣는다는 이념으로 최선을 다하지만 세상 모든 이를 생명으로 돌리지는 못 한다.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병원일 지라도.
병원 내에서도 심정지나 호흡곤란 등 생명에 위협이 있을 만한 상황은 중대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가 발생할 시, 매뉴얼에 따라 최초 상황을 목격한 의료진의 조치가 이루어질 뿐 아니라 응급의학 전문팀의 치료가 이어질 수 있도록 병원 전체에 방송으로 전파된다. 이런 방송에는 대략적인 준비를 할 수 있게끔 정보를 담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문제가 발생한 장소를 포함한 몇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대부분의 발생지는 응급상황이 잦은 중환자실이나 심장, 호흡기 환자들이 입원한 병동, 그리고 여러 환자가 모여드는 X-ray나 CT 등의 영상 촬영실이 일반적이다. 한 명의 생명이라도 필사적으로 살리기 위해 전파가 송출되는 순간부터 수십 명의 사람이 달려와 사그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행동하기 시작한다. 병원이기 때문에 나오는 일상적인 소리 같지만 한 편으로는 한 명의 삶이 끝을 향해 달려가는 슬픔을 느끼게 한다.
재활을 시작하는 환자는 상대적으로 활력징후가 안정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이런 상황을 마주하는 확률이 낮은 편이다. 하지만 이미 생과 사의 경계선에서 돌아온 이들에게 절대라는 경우의 수는 있을 수 없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위급상황에 대비한 온갖 장비를 갖추고 이와 같은 상황에 대비한다. 순간, 순간 환자의 상황을 살피고 위협을 되는 요소들을 우선적으로 해결한다. 잠시의 느슨함이 생길 때면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만나 다시 긴장의 끈을 조이곤 한다. 이렇게 끊임없는 준비를 하지만 결국 우리는 사람일 뿐, 우리의 손을 떠나가는 상황을 잡기엔 무력한 순간을 만나고야 만다.
임상 초기, 내가 치료실 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중환자실과 병실이었다. 30분 이상을 치료에 전념해야 하는 물리치료실에서의 치료와는 다르게 병실에서 하는 치료는 치료실에 내려오지 못하는 중환이 많다. 따라서 컨디션 및 신체 상태 유지 목적으로 물리치료가 진행된다. 5~10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치료를 하는 처방이 나오는 이유이다. 더불어 짧은 치료 시간 때문에 다수의 환자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전 병원을 돌아다녀야 한다. 그만큼 이동거리가 만만치 않아 주로 경험이 적은 낮은 연차의 치료사가 맡게 된다. 중환자를 경험이 낮은 치료사가 진행하는 것에 의아해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오히려 병실은 치료실보다도 응급상황을 대처할 의료진이 더 많이 위치하고 있으며 간단한 움직임을 만들어주는 정도의 치료만 진행하면 되므로 부담감이 적은 편에 속하기도 한다.
외과 중환자실, 내과 중환자실, 심장 중환자실, 중환자실 종류가 얼마나 많은 지 처음 병원 생활을 해보는 내게는 신기한 충격이었다.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치료를 시작하는 임상 첫 기간이 가장 많은 죽음을 마주하는 시기가 되었다. 어제까지는 안정적이었지만 오늘 가보니 이름이 없는 환자, 치료하러 갔지만 더 이상 치료를 진행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환자, 치료하는 중에도 옆에서 심폐소생술을 진행하고 있는 환자. 생을 마감하는 곳 한복판에 서있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 속에서 휘젓게 해 준다. 하필 치료사라는 이름을 단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인 만큼 집에 돌아와 혼자 수많은 생각에 사로잡혀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실습생을 데리고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병동으로 향했다. 처음 보는 환자의 이름이 적힌 병실로 찾아가 환자의 상태를 살폈다. 인사를 하는 순간부터 이상했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환자의 모습이었다. 너무나도 얕은 호흡, 창백한 표정,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갖다 댄 손에서 전해지는 차가운 냉기의 손과 발. 치료를 시작도 하기 전부터 담당 간호사 선생님께 상황을 알려야 했다. 환자를 확인한 선생님으로부터 건너온 대답은 심폐소생술 거부 환자라는 사실이었다. 마음 한편이 불편했지만 치료를 진행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을 건네 듣고 떠나와 다른 병실을 돌았다. 다른 병실을 도는 중에도 어딘가 마음에 걸렸다. 이런 상황이 처음이어서 일까. 알지 못한 불안을 마음에 품고 병실 치료를 마쳤다.
치료실로 돌아와 한 숨 돌리고 자리에 앉는 순간 울려온 한 통의 전화. 방금 전에 보았던 환자가 돌아가셨다는 전화였다. 보통은 그런 상황을 치료실로 알리지 않기 때문에 왜 이런 전화가 왔는지 여쭈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이야기가 나를 당황시켰다. 생전 마지막 모습을 확인한 사람이 나라 생각하고 보호자께서 면담을 요청한 것이다. 마지막 모습을 나에게서 듣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보호자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지만 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치료실의 부서장 선생님께 상황을 알리고 함께 병동을 찾아가기로 했다.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상황이지만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갈지는 알 수 없었다. 괜한 긴장감을 품은 채 다른 환자의 치료를 이어가야 했다. 결과적으로는 치료가 끝나는 시간까지 기다리기 어려웠던 보호자가 전화 상으로 당시 상황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마무리되었다. 생각보다 가벼운 마무리였지만 그날 밤은 그 어떤 밤보다 잠들기 어려웠다.
치료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말 한 번 건네 보지 못한 환자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볼 자격이 내게는 있었을까? 지금까지 마음속에서 드는 의문이다. 그들의 삶, 아니 하루 조차 알지 못하는 내가 치료복을 입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족조차 보지 못한 생전 마지막 하루의 순간을 바라본다. 내게 수화기 너머로 마지막 모습을 전해 들은 가족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듣고 있었을까. 내가 앞으로 겪게 될 긴 임상 속에서도 이 물음은 해결되지 않지 않을 것 같다.
오늘도 한 차례 재활 병동에서 심정지를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삶을 위해 병원이라는 바다로 희망차게 배를 띄워 보지만 그 모두가 다시 항구로 돌아오지는 못한다. 각자 배를 띄우는 이유는 다르나 모두가 염원하는 한 가지. 무사히 항해를 마치고 돌아오는 것. 그 어려운 여정을 위해 오늘도 나는 펼쳐진 돛을 부여잡은 채 힘차게 출항의 신호를 알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