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률은 천재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김동률을 들었지만, 정말 그의 변태적인 완벽성에 소름이 돋았던 건 2011년에 나온 <Replay>라는 노래 때문이다. 3분 30초쯤 듣다 보면 "와르르 무너질까" 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이 때 배경음으로 나오던 현악이 높은 음부터 낮은 음으로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연주법을 말하는 음악 용어가 있을텐데, 잘 모르겠으니 그냥 '와르르 무너지는 연주법'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당시에 이 노래를 처음 들은 나는, 이 '와르르 무너지는 연주법'을 발견하고 굉장히 흥분된 마음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했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한 명은 "어쩌라고."라고 말했던 기억이 나고, 한 명은 "너는 연말인데 와르르 무너지는 노래를 듣고 있냐"라고 말했던 기억이... 아무쪼록 남자 놈들이란 자기보다 잘 생기거나 노래를 잘하는 남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법이죠.
하지만 더 무서운 노래는 따로 있다.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에 20대를 보낸 대한민국 남자라면 한 번쯤 노래방에서 폼잡고 불러본 적이 있는 <취중진담>이라는 노래다. 노래 제목 그대로 술 취해서 오랫동안 좋아했던 친구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가사 내용인데, 지금 같아서는 절대 그러지 말라고 멱살을 잡고 말리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 나름대로의 분위기와 낭만이 있다고 믿게 만들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굉장히 몹쓸 노래군요.) 실제로 이 노래를 한동안 흥얼거리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는데, 노래처럼 취중고백을 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 때의 짝사랑은 실패로 끝났던 기억이... 아무튼 지금도 <취중진담>을 들으면 그 때의 낭만이 어렴풋이 기억나곤 한다.
정말 무서운 건 이 노래는 절대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음 먹고 부르면 Pharrell Williams의 <Happy>처럼 24시간도 부를 수 있다. "고백할까? 에이, 다음에." 라는 무한 반복의 덫에 갇힌 20대 특유의 찌질함을 끝나지 않는 반복구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김동률은 전람회 시절부터 철학적인 가사로 유명했지만, 때로는 현실적인 언어로 찌질함을 극대화하기도 했다. 5집 <Monologue>에 수록된 노래 <그건 말야>의 가사를 보면, <취중진담>의 그 친구가 군대를 다녀와 졸업을 하면 이렇게 찌질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인생의 보편적인 진리를 깨닫게 된다. (쓰다 보니 왠지 점점 비난조가 되어 가는 기분이 드는군요.)
우연히 알아버린
니 결혼 얘기에
무작정 너의 집 앞을
찾아가게 되었지
(중략)
어렵게 너를 불러 내놓고
난 또 다시 아무말도 못하고
얼굴 봤으니 됐다 그만 들어가봐
돌려보내는
그건 난 아직 너를 사랑하니까
- 김동률 5집, <그건 말야> 중에서
사실 위에 적은 노래들 말고도 김동률의 노래는 대체로 매우 좋아한다. 중3때부터 작곡을 시작해 버클리 음대를 거친 만큼 김동률의 노래들은 음악적 완성도가 굉장히 높은데, 피아노 하나로 냅다 조지는 <동반자>나 <잔향>, 반도네온으로 탱고를 완벽하게 구현한 <배려>도 굉장히 좋아한다. (특히 콘서트 라이브 버전에서 고상지의 반도네온 연주는 정말 굉장하죠.) 현악을 층층이 쌓으면서 감정을 고조시키다가 일순간에 와르르 무너뜨리는 실력은, 역시 김동률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매일 매일 김동률만 듣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좋아해도 짜장면만 매일 먹을 수는 없듯이, 한참을 듣고 있다보면 몹시 우울하고 음습해지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동률을 듣게 되는 계절은 반드시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주기적으로 사랑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싱어송 라이터만이 할 수 있는 음악과 가사의 일치, 무엇보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관된 찌질함 때문에.
이번 주 김동률이 신곡으로 돌아온다. 이번 노래는 얼마나 찌질할까. 이번 앨범은 얼마나 진심일까. 벌써부터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