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by gomer

언어수업에 가면서 한동안 쓰지않았던 수첩을 들고 갔다. 두터운 수첩을 여는데 파르르 스티커가 떨어졌다. 갈색, 밤색, 감색의 난 널 사랑해란 단순하고 촌스런 문구의 스티커였다. 잊고만 있었던 감정들이 물밀려 올라왔다.


이십대의 대학생이 대학교 교정 혹은 기숙사에서 자살하는 경우는 과연 정상적인 경우가 아니다. 내가 석사를 했던 학교에서도 같이 종종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유독 그 학교가 매스컴의 주목을 쉽게 받았다. 재학 중에서도 두어 번 비보를 접했다.


그 중 한 대학원생이 기숙사 방 안에서 목숨을 끊었을 때였다. 원인은 잘 모른다. 혹자는 연구실 비관이라하기도 했지만 정확한 원인은 잘 모른다. 그가 삶을 정리한 이유를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야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분위기가 순식간에 흉흉해졌다. 교수는 힘든 거 없느냐 물어오는 개별미팅에서 나는 알랑방귀를 뀌며 어머나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따위의 표정을 지으며 어떻게 하면 연구실을 빨리 그만나올 수 있을까 졸업얘기를 꺼냈다. 함께 운동하던 오빠는 목숨을 끊은 그 방이 자기 옆옆방이라며 한숨을 쉬다가 웃었다.


그 밤, 룸메는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창문옆 책상에서 무릎을 쪼그려앉고 노트북이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는데 무시하려다 복도의 어수선한 소리가 거슬려 문을 열었다. 이거 대학원 총학생회에서 나눠드려요. 어설프게 포장된 초콜릿과 떡과 같이 작은 먹거리와 편지봉투가 있었다. 봉투를 여니 총장으로부터의 엽서, 그리고 손바닥 반만한 스티커들이 떨어졌다. 난 널 사랑해, 세장이나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학생회였는지 총장의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총장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학생들은 매점 아주머니와 기숙사 사감선생님께서 써주신 편지를 랜덤하게 받았다. 이젠 어디가있는지 모르는 엽서,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미안하다고 했는지, 시간은 지나가기 마련이라고 했는지, 힘들지않느냐고 물어보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야말로 특별히 서러울 것도 없었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져내렸다. 결국은 어떤 무력감의 원인이 되었던 시스템으로부터의 분노, 그래 그들은 각자의 인생이 더 중요하도다 를 깨닫곤 님들에 대한 막연한 배신감 및 불신과도 같은 부정적인 생각들에 새로운 길이 났다. 고작 옆서 한장인데 충분했다. 그것이 진심이라면, 어떤 형태이든 얼마나 불특정다수이든 상관없어, 나에겐 충분해. 한 때 무력했던, 실망했던 나를 밟고 나아가 너네들보다 훨 나은 사람이 되겠어.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날 밤 생각이 났다. 얼마나 내가 분명하지않은 시스템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는지에 대한 감정은 새로운 형태로 변화했다. 되려 체계가 잡히지않은 사회, 와중에 혹은 까닭에, 다양한 의미에서의 약자와 소수자가 먼저 ..되는 사회에서 성장한 것치곤 많은 보호를 받았음을 깨닫게 됐다. 까닭에 사회에 채무의식을 가지고, 소수자와 유입자에게 배타적이지 않으며 팔로어를 알맞게 가이딩해가는 사회의 체계를 마련해낼 수 있는 구성원으로 나아가고 싶다.

/2015. 10. 27.


1. 왠지 브런치 서비스가 굉장히 언스테이블하다는 막연한 느낌이 든다. 시작한지 몇달도 채 안됐는데... 이전에 썼던 일기들을 다시한번 읽어보고 고쳐보고 그 중에 누군가에게 더 얘기해주고싶은 보여주고싶은 일기들을 골라 재포스팅하는 일은 나에게도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돌아보는 즐거운 일이었는데 왠지 이 서비스가 곧 끝날거 같은 막연한 불안감이? 다른 아카이브를 물색해봐야 할까..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브런치팀!)


2. 사실 나의 일기의 대부분은 참 블루블루한데 그 중 다른 색을 많이 띠었던 일기들을 이미 포스팅됐다. 그 밑바닥이 이미 다 드러나 이젠 다소 파란 일기장의 페이지들밖에 남지않았습니다.

/2017.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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