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_

원숭이 탈.

by 제환



달빛에 비치는 그림자는 형체를 이루지 못한다.


발아래 꺼진 그림자를 빛의 형태로 다듬어서 세워보려 해도

다시 푹 꺼지며 쓰러진다.

무너진 폐허다. 무덤이다. 무형의 것이다.


이것은 누구의 무덤인가.

묘비명이 적히지 않은 무덤은 그저 낮은 개미들의 고봉일 뿐이다.


썩어가는 몸뚱이에 기름칠하듯 살아간다.


‘살아있는데 굳이 죽은 자의 말을 쓸 필요는 없는 편이죠’

말을 뱉은 혓바닥이 죄를 짓는 기분이다.

벌을 받아 길게 갈라지던 혀는 뱀의 혀가 되었다.

그건 누굴 위한 말이었나.


죽은 이가 산 자의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아이러니.

산 자가 죽은 이의 말을 쓰고 싶어 하는 아이러니.

모든 세상이 모순적이고 역설적이다.


둘 다 저 너머의 걸 원한다면

차라리 서로의 심장을 교환하는 건 어떨까?

고개를 내리니 텅 빈 공간이 나를 마주한다.

내 심장은 이미 남자친구가 가져갔던가.

심장은 하나 뿐이기에

내가 기워 만든 천 조각의 모형 심장은

피 대신 기침하듯 들썩이며 먼지만을 뱉어낼 뿐이다.


심장이 없으면 교환을 할 수 없다.

제 몸 온전한 산 사람이 밉다.

내 천 조각의 낡은 자루를

쥐어짜서 나온 먼지들을 전부 먹여주고 싶다.

내 글에 독을 탈 걸 그랬나.

혀를 깨물고 말을 삼킬 걸 그랬나.


이번에도 시체 주제에 산 사람을 흉내 내는 아이러니.

사람도 아닌 것이 사람을 흉내 내는 아이러니.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달로 떠나면

그땐 나만이 살아남을 테니 나는 인간이 될까.

그럼 나는 모든 사람이 떠오르기를 손 모아 기다려야 하나.

정작 외로움에 사무쳐 눈물을 흘릴 모순적인 짐승이

그림자 속에 똬리를 튼다.


“너는 사람이냐, 무엇이냐”

그림자가 묻는다.

“나는 나일 뿐인데요.”

“아니. 아니다. 너는 산 사람도, 시체도, 사람도 아니다.”


그럼 무엇인데요?

나의 물음에 그림자는 비웃을 뿐이다.

그림자의 머리를 짓이기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땅이 푹 꺼지며

검은 물속으로 나를 초대한다.




이곳은 위도 아래도 좌우도 앞뒤도 없다.

그저 저 멀리 거대한 내가 나를 안기 위해 팔을 벌릴 뿐.

너덜거리는 내 껍데기를 안아주는 공간.


공허의 공간. 공백의 순간.

나의 깊고 질척이는 검은 별. 우주.




거울 속에 보이는 내 동공이 깊다.

그 속에 별과 우주가 있는지 살펴보고 싶었다.

눈의 너머. 그러니까 뒷면은 볼 수가 없기에.


보면 안 되는 걸 사람들은 암묵적인 약속처럼 나눠 갖기에.

그저 거울에 머리를 가까이 들이밀고

벌어지지 않는 눈덩이를 손으로 우악스레 벌리며

나는 우주를 찾아다닐 뿐이다.


반짝이는 별들 틈에서 나는 목성을 보았다.

아! 보인다! 우주가 있다!

날카롭게 올라가는 입꼬리로 우주를 긁어내고 싶었다.

그렇게 꺼낸 작은 우주를 함에 보관해야지.


그리울 때면

함에서 시들어가는 우주를 꺼내

멸망을 향해 나아가는 그 몸짓에 입을 맞추리라.




사람이 속을 나눠주면 장기기증이고

정신을 나눠주면 그건 정서 기증일까?


그 말이 싫진 않다.

나란 존재는 한없이 가볍고

형체 없이 부유하는 존재 같아서.


이런 괴이한 정신이라도 남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내 모든 것을 박박 긁어모아 전해주리라.

내 정신의 모든 부분을 아낌없이 주고 텅 빈 껍데기가 되어도 좋다.



기증은 죽은 자만이 할 수 있다던데.

나 역시 정신이 죽었으니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죽은 주제에 산 사람인 척 흉내를 낸다.

기꺼이 남들에게 기증하겠다며 들뜬 주제에

머리카락을 이로 짓씹으며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낸다.


아이러니.

온통 아이러니한 일 뿐이다.

천장에 매달려 살아가는 나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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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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