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머무른 마음

사라지는 중에도 누군가는 나를 듣고 있다.

by 제환

밝게 집안을 비추는 햇빛은

어쩐지 조금씩 생기도, 따스함도 사라져만 간다.

깜빡이는 눈 아래서 작게 탄식이 흘러나온다.

천천히, 느릿하게 늪 속에 빠져

숨이 멎어가는 느낌에 가까울까.


그나마 미약하게 남아있던 감정들도

이젠 작별을 할 때가 되었나 보다.

적어도 S에게 작별을 고하는 글을 쓸 땐

터져 나오는 울음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온 마음을 헤집어 보아도

이젠 메마른 사막에서 물을 찾는 기분이다.

느껴지는 햇살조차 어쩐지 무감각하다.



‘자격증 필기시험 가채점 합격’



네게 무언가 자극이 되길 바라며

보내었던 글을 멍하니 바라본다.

너도 나아가려 애쓰고 있을까.


적어도 내가 뱉는 말이

무의미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 달에 가까운 유예기간을 겨우내 채우며

몸을 움직이면 정신은

무겁고 커다란 옷처럼 바닥에 질질 끌려간다.


바닥에 끌려 망가진 옷처럼

정신도 닳아간다.



구태여 이런 얘기를 할 사람도 없다.

굳이 평화롭게 잘 지내는 이들에게

구정물 같은 말을 쏟을 필요는 없으니까.


이제 침묵은

내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가 되었다.



작게나마 느껴지는 감정들도

긍정적인 게 없으니

한 데에 모아 뭉치고 굴려서

결국엔 쓰레기처럼 버렸다.


부질없는 것투성이다.

표현하지 못할 감정,

표현해도 받아줄 사람 없는 감정.


기대지도 못할 관계가 무슨 소용인가.

그렇다면 굳이 이어갈 관계엔 어떤 의미가 있지?


생각의 끝에서

스스로가 놀라 괜히 입을 틀어막는다.


하지만 이미 입안에 들어찬

혀와 생각은 멈출 줄 모른다.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생각은

너무도 잔인하다.

그래서 스스로를 이기적이라며 깎아내린다.



회사는 집중이 안 된다.

이런 내가 섞이면 안 될 존재 같아서

혀를 깨물고 사람들과 거리를 둔다.


왜 나는 이렇게까지 불쾌한 존재인 걸까.

생각을 그만두고 싶다.

멍청해지면 판단력이 떨어지고

이기심도 줄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다른 곳에 신경을 두며 생각을 그만두려 하여도

시선 가는 곳이 없다.

버겁다는 생각이 내 발목을 깨물고,

고요한 절망이 속을 채우려 들면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S의 이름이 핸드폰에 비친다.


이런 상태에서

네 고통까지 감당해주고 싶지 않은데.


지친 손으로 메시지를 확인하면

S의 연락은 의외로 담백하고 간단하다.



-나 이직 확정이야.

-여기로 출근이야. 오늘 면접 보고 왔어.



차분한 그 말에

천천히 숨을 내쉰다.

기쁨을 느끼진 못하지만

적어도 확실한 ‘변화’가 있으니 다행이다.


참 신기하지.

이런 타이밍은 참 기가 막히게 잘 맞춘다.


어떤 대답을 하는 게 맞을까

잠시 고민해보았다.

관계를 맺지 말라던 의사의 말은

결과적으로 서로에게 마음을 보이지 말라는

얘기였을 텐데.



-결과적으로 자리 이동 있는 거 맞네. 다시는 내 타로를 샤머니즘이라 무시 마라.

-넹..



이 즈음에서 원래라면 대화를 끝내야 했지만

담백한 말이 되려

무언가를 건드린 기분이었다.

그렇게 자신 있던, 한때 나를 지켜주던 그때의

네가 겹쳐 보였다.


그때의 너는 정말 강했지.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며 괜히 네게

기대고 싶어지는 이 충동은 무엇일까.


지금은 나보다 더 지쳐있을 너를 알면서도

기대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참 정떨어지는 마음이다.



-좋겠네. 잘 다녀라. 나는 퇴사한다.

-왜?? 회사 망했어??



뜬금없는 말에 기어이 작게 웃음이 터졌다.

짧은 설명과 함께

신경 쓰지 말고 너는 너만 생각해.

나는 내가 알아서 하니까.


찰나 의지한 마음에

다시 선을 긋는다.

하지만 그 대화 안에서

무언가가 조금 비워진 기분이었다.


조금이나마 가벼워진 정신을

곱씹어 본다.


지쳐버린 건 여전하지만

속을 조금 내보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숨통이 틔는 기분이었다.


저녁 바람에 스민 아카시아 향이 느껴진다.

더는 무감각하지 않다.


덕분에 머릿속도 잠시 조용하다.


여전히 내가 표현할 수 있고,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걸 미약하게나마

깨달은 날이었다.

흐려지는 날 속에서도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생각이

물속에서 작은 숨결처럼 살아나고 있다.


말할 수 있다는 건 아직 숨 쉴 수 있다는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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