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엄마는 월요일 아침에 뒹굴거리는 날 보며 가끔은 내 게으름이 부럽다고 말했다. 그 땐 단순히 비아냥 거리는 잔소리라고만 생각했는데, 어른이 되서야 그 말이 다시금 와닿기 시작했다. 진정으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마음가짐이란 실로 대단한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우린 적어도 나중에 나태지옥 갈 일은 없겠다"
작년, 격주 매거진의 미친 마감 스케줄을 함께해온 동료 기자들은 항상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주말도, 공휴일도 없는 삶의 형태에 갇혀 있던 우리에게 여유란 그런 존재였다. 그저 남들만큼 살기 위했을 뿐인데 점점 일상은 삶을 뒤돌아 볼 여유조차 없는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간절한 바람은 끝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퇴사를 결심하고, 지난 일 년간 밀린 휴가를 쓰기로 결정이 난 후 드디어 여유라는 것을 맞이할 기회가 찾아왔다. 알람을 꺼놓은 채로 뒹굴거려도 되는 아침. 평일에 떠나는 2박 3일짜리 여행. 다함께 멋지게 휴가 신청서를 낼 때만 해도 이런 여유 있고 행복한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휴가 첫 날부터 시작된 세상은 시궁창이 따로 없었다.
도둑질도 해본 놈이 한다고. 쉬어본 적이 없으니 도대체 무엇부터 해야할 지 난감하기만 했다. 무작정 독서에 파묻혀야 할지, 어딘가 싸돌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야 할지. 무언가의 목적이나 성과가 있는 일이 아닌,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건 생소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그 자체가 불행의 서막이었다. 남들이 다 일하는 시간에 노는 것에 대해 마음이 불편하기만 했고, 낭비했다고 느낀 그 시간만큼 뒤쳐지는 것만 같았다. 또한 준비없이 찾아온 여유는 그저 불안을 떠올릴 시간밖에 주지 않았다. 다음 이직 자리는 어떤 분야로, 어떤 위치로 해야 할지. 앞으로 뭘 해먹고 살아야 할지. '이 나이에 여전히 진로 고민이라니이게 말이 되냐'는 자기비하 타임도 틈틈히 아끼지 않았다.
내가 발을 내딛은 그 곳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는 또다른 지옥, '여유 지옥'이었다.세상의 모든 불안을 쥔 사람 마냥 매일 밤 모든 기운이 빠져야만 잠에 들 수 있던 지난 주를 지나보내며 머릿 속에 간절히 찾고 싶은 답은 정말 단 하나였다.
"이 불안을 모두 사라지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애초에, 이 질문 자체는 답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어차피 우리는 불안함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진리는 대학 시절, 한 교양 시간에 깨닫게 되었다. 심리학과 관련된 교양 수업이었는데 당시 교수님은 "불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주위 사람들에게 동영상을 찍어 오라는 과제를 내준 적이 있다. 카메라 한 대를 들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던 중, 영상을 찍어준다며 흔쾌히 수락한 한 동기가 이렇게 내게 말했다.
"불안은 이불 속에 뀐 방귀같은 거죠. 피할 수 없고, 결국은 맡아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의 말을 듣고 순간 무릎을 탁 쳤던 이유는, 불안의 존재가 정말 그러했기 때문이다. 불안은 피할 수 없고, 이불을 털고 더욱 발버둥 쳐도 심한 냄새를 맡을 뿐이다.
불안이란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러기에 결국 이 세상에 불안함을 없애는 방법 따윈 없다. 그러니 쉴새없이 우리를 습격하는 불안함에 더욱 불안할 마음이라면 그 무게를 조금 가볍게 먹는 편이 좋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다. 어차피 우린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불안해질 수 있는 존재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불안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자세는 있다. '할 수 없는 것' 보다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 그리고 이 시기를 넘길 수 있는 내 자신의 강인함을 믿는 용기를 가지는 것. 앞으로 어떤 선택지를 내리느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미래에 대해 조금씩 생각하는 것.
그 과정만 해낸다면 어느 정도는 괜찮아졌다고 말할 수도, 세상의 방귀가 내뿜는 불안의 지독한 냄새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훨씬 쾌적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