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비가 한 차례 퍼부은 뒤 날씨가 쌀쌀해졌다. 부쩍 차가워진 공기 탓일까, 따뜻한 단호박 수프가 떠오른 나는 집 근처 수프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가게 내부는 어두컴컴했다. 문 앞에 다가서서야 나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텅 빈 가게 문에는 작은 쪽지 하나가 붙어 있었다.
그동안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다. 수프 집은 폐업을 해버린 것이다. 텅 빈 손으로 쓸쓸히 집으로 돌아오던 중, 한 가지 전복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사실 가게의 주인은 그 쪽지를 읽을 대상들에게 전혀 감사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는생각. 애초에 식당이 문을 닫은 건, 우리가 그 식당을 꾸준히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니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는 그런 친절한 쪽지를 붙일 필요조차 없었다. 손님이 끊겨 장사도 망해서 짐 싸는 판에, 오히려 "왜 그동안 찾아오지 않았어요? 저희는 이제 그쪽 때문에 폐업을 하게 되었네요"라고 붙여도 시원찮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입장에선 비아냥대고 원망하고싶은 손님들에게 왜 저런 쪽지를 붙인 걸까.
기다려도 누군가가 오지 않고 쓸쓸히 문을 닫고 떠나는 가게와도 같은 관계들이 과거의 내게도 존재했다. 사랑을 받지 못해, 혹은 주지 못해 끝나는 관계들. 식어버린 수프처럼 눅눅한 앙금처럼 가라앉은 사랑의 잔재들만 남은 채로 끝난 사이들. 그런 관계 사이를 지나오며 무심코 나는 사랑이란 언젠가는 자신에게 오는 발걸음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아야 하는 존재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단호박 가게의 쪽지를 본 순간, 무언가 마음속에 잊고 있었던 가슴 찡한 것들이 터져 나왔다. 영원하지 않은 상대방,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 마음. 이 묘하게 간질간질거리면서 슬픈 마음이.
결국 그 묘한 감정의 카타르시스 끝에 남은 말은 하나였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 하지만 그 영원하지 않음 마저도 아름다워서 사랑이다."
사랑이 영원하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아무리 퇴색되지 않게 부지런히 닦아 유지하고, 진심이란 원동력을 끊임없이 불어넣는다 해도, 정말 어쩔 수 없이 영원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모든 성가신 순간들이 모여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 것이 사랑이란 존재다. 맛있고 따뜻한 단호박 수프의 향기, 음식을 미소와 함께 가져다주는 주인의 미소, 그로 인해 웃음꽃이 피는 손님들의 풍경 등, 그 모든 추억은 가게가 없어지더라도 그 자리에 남는다.그러기에 수프 가게에 붙여져 있던 문구는 결코 자신을 떠난 상대방에 대한 공격도, 비아냥도 아닌 그저 진심이었을 것이다. 가게를 찾아 불을 밝혀준 모든 손님에게 건네는 최후의 감사 표현이자, 인생의 어떠한 지점을 나눠가질 수 있었다는 그 벅찬 사람에 대한 마지막 인사였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비록 폐업은 슬픈 일이나 이 수프 가게를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만 같아 다시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다음에 언젠가 주인 분을 다른 곳에서 마주치게 된다면 이렇게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