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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은 Jean Aug 31. 2020

최대한 무능력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

나는 얼마나 Yes맨으로 살았던가



"저 사실 포토샵 할 줄 알아요.
그런데 말 안 하는 거예요. 시킬까 봐."

직장 동료들과 커피타임을 가지던 중 갑자기 한 동료가 던진 말이었다. 회사를 최대한 스트레스 없이 다니기 위해선, 최대한 무능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의 의견이 우리의 대화 속에서 강한 설득력을 지니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비단 한 명이 아닌, 모두가 이러한 상황들을 회사에서 겪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포토샵 할 줄 알아요."
-> 포토샵 할 일만 생기면 시킴

"글 쓸 줄 알아요"
-> 기획안 쓸 일만 생기면 시킴

"집에서 요리 많이 해 먹어요"
-> 회식에서 고기 구울 일만 생기면 시킴



틈새만 보이면 일을 시키는 직장 환경에 오래 속한 이들은 결국 귀찮은 일을 만들지 않으려면 최대한 자신의 능력을 숨기고,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식으로 결론을 지었던 것이었다. 일하는 곳에 와서 능력을 숨겨야 한다니. 참으로 황당한 이 사태에 대해 궁금했던 나는 그 기원을 좇아가 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속에는 한 가지 전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 또한 신입 때는 상사가 어떠한 일을 주든 정말 열심히 했다. 기존 업무는 기본에다 잡일까지 도맡아 하며, 그것이 눈에 띄는 일이든 아니든 정말 회사라는 세상에서 성실히 버텼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점차 회사의 대우와 분위기에 희미해져만 갔다.


문제는 성과에 대한 보상이었다. 열정으로만 회사 업무에 부딪히던 시절, 나는 내가 야근을 하며 버티던 업무에 대해서 보상, 아니 적어도 "잘했다"는 말 한마디 정도는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당시의 회사 분위기와 상사의 성격은 그놈의 열정이 바스러질 만큼 최악으로 치달았고, 성과에 대한 명확한 보상은커녕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이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하며 나의 성실함을 인정받는 길이라고 당연시했다.


결국 그런 일들이 반복되던 어느 날, 머릿속에서 끈 하나가 툭 떨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게까지 나의 능력을 희생하며 버텼던 이유에는 인정 욕구라는 것이 있었다. 예스맨. 상사의 눈에 들기 위해,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참 오랫동안 소위 말하는 '넵'맨으로 살았다.


제때 먹는 맛있는 저녁 식사, 일을 끝나고 맞이하는 따뜻한 개인의 시간 등을 다 포기하며 시키는 일에 매진했다. 하지만 모든 걸 얻었다고 생각한 후에 내가 돌아본 나의 인생은 그저 황무지일 뿐이었다. 더 이상 남아있지 않는 가치의 바닥에서 나는 내 마음에 있던 열정이란 불씨가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나는 싸워왔던 것이 아니라, 단지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무능력하게 보이자고 하는 직장 동료들에게 감히 반박할 수 없다. 물론 무능력(해 보이려고 노력)한 사람이 많은 회사는 그냥 그 사람이 죄인 경우도 있다. 팀플이 망하는 이유가 공산주의 국가가 실패하는 이유와 같다고 했던가. 어떠한 집단에나 무임승차는 있기 마련이고, 아무리 혼자 열심히 해봤자 능률이 오르지 않는 조직이 존재하기에, 오히려 별 이유 없이 단순히 '무능력한' 직원이 역으로 회사의 발목을 잡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를 제외하고는, 무능력이 타당한 경우들을 깊이 이해한다. 소위 '헤헿-'의 자세를 견지하는 사람들. 맡기거나 엄두도 못 낼 일들은 아예 건드리지도 않으며 혹시 상사나 회사가 무리해서 시킬 경우 그냥 "헤헿- 저 잘 모르는데요"라고 말해버리는 사람들을.


능력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는 환경, 나 몰라라 식으로 무한한 업무량을 쥐어주는 회사들이 이런 식으로 많아진다면, 과연 그 누가 무능력해 보이려는 이들에게 돌을 던질 권리가 있는지 나로선 당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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