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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애인과 헤어졌을 때마다 고향에 내려간다

부산행 열차 타고

by 정지은 Jean

나는 애인과 헤어졌을 때마다 고향에 내려간다.


그 이면에는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첫 번째로 "이 세상에 진정한 사랑 따윈 없어. 내 다시는 연애를 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상쇄할 거대하고 숭고한 사랑이 필요해서다. 예를 들어, 부모님과 같은 가족이 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유치한 마음이기도 하다. "흥 난 이렇게 날 사랑하고 아껴주고 밥 해주는 사랑스러운 가족이 있다고!"라는 의미 없는 혼잣말이기도 하다. 아니, 그냥 무엇보다도 일상이 무너진 때에 내가 살아갈 이유가 담긴 얼굴들을 다시 쳐다보기 위함이다.

나의 부모님의 경우,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는 하나,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는 종류의 위로를 주진 않는다. 오히려 날 "저거 또 어디서 남자랑 헤어지고 기어들어왔네"라며 경멸스럽게, 동시에 사랑스럽게 쳐다본달까. 여하튼 다른 방식의 위로다.


가족이 날 미워할 수 없는 배경에는 그 두 번째 이유가 있는데 바로 나의 생겨먹음이다. 엄마와 아빠는 나를 어릴 때부터 세 가지 가훈으로 나를 키웠다.


1. 매사에 최선을 다하자

2. 서로 사랑하자

3. 무슨 일이든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자


그 결과로 부모님 말만 믿고 올바르게 자란 나는 성실하면 뒤통수 맞기 딱 좋은 흉흉한 세상 속에서 요지경으로 자랐다. 매번 열과 성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했으며, 그러기에 사랑이 떠나면 무너질듯한 아픔을 매번 겪었다. 그리고 그 아픔은 자책으로 이어져 더 많은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니 다시 묻는다. 이 무른 마음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 그런 맥락에서 부모님은 이 못난 딸을 경멸스러워도,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어차피 못나도 내가 키운 내 못난 이니까.


서울과 부산은 어떻게 보면 국내에서 서로 꽤 먼 거리다. 그래서 서울에서 있었던 일을 서울에서 정리하기 힘들 땐, 부산에 와서 지우는 것이 생각보다 엄청난 후련함을 준다.


이것은 내게 하나의 의식과도 같은데, 예를 들어 내 20대 초반을 강렬히 장식했던 쓰레기 남자 친구가 줬던 선물들을 5년 동안 간직하다 교환학생으로 영국에 가서야 런던의 쓰레기통에 겨우 던지고 온 때와 같았다.


그러기에 애인이랑 헤어지면 고향에 내려가는 게 딱이다. 그냥 거실에서 최애 프로그램인 세계 테마 기행이나 보면서 아빠가 잘라준 참외나 먹고, 누워서 배 긁는 게 힐링 그 자체다.


티브이 속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전통악기를 다루는 아일랜드 뮤지션들과 인도네시아에서 빨래를 하는 젊은 청년들을 보다 잠들면 어느새 서울의 치열한 삶은 머나먼 전생의 기억으로 자리 잡아 이별이고 뭐고 저세상 이야기가 된다.


사실 이번이 처음이다. 실연이 너무 힘들어서 부산에 내려왔다고 직접 말한 건.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엄마는 항상 눈치채고 있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게, 저번에 내려왔을 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엄마는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나에게 작별 인사로 쪽지를 하나 건네줬는데 그 안에는 마지막 말로 "서울 남자 조심해라"가 쓰여 있었다. (보통은 서울 '생활' 조심하라고 하지 않나... 엄마...?)


역시 엄마는 보통내기가 아니다. 아마 내 29년 인생 중 날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경력을 지닌 어머니일 것이라, 다시금 실감했다.


엄마는 이별을 겪는 내가 아침에 일어나 꺼이꺼이 울든, 상관하지 않는다. 이미 한 두 번 본 사태가 아니라는 식이다. 절대 위로하지 않으며, 그 애인이 누구였는지, 어떤 스토리가 있었는지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대신 날 움직이게 한다. "고작 남자 한 명 때문에 꺼이꺼이 우는 딸내미는 엄마 물 한잔 안 따라 주네~~", "남자 한 명 때문에 이불에 처박혀 운다고 엄마 심부름 하나 안 들어주네~~"라는 식으로 비꼬며 반복운동을 시킨다.

그럼 난 또 그렇게 눈물을 닦고 일어나고, 그렇게 청소를 하고, 그렇게 심부름을 한다. 그러다 보면 방금 실연해서 슬퍼 죽는시늉까지 하는 여자는 어디 가고 충실하고 바지런한 종 하나가 서있다.

엄마가 등짝 스매싱 파라면 아빠는 <리틀 포레스트> 파다. 평생을 공직에 계시다 은퇴한 아버지는 밭을 하나 사셨다. 넓은 밭에서 가족들이 먹는 유기농 채소들을 재배한다.

아빠는 지쳐 보이는 나를 항상 아빠의 밭으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아빠와 함께,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찍는다. 잠시나마 서울의 고단한 공무원 시험 준비에 지쳐 시골로 내려온 김태리가 된 느낌을 느낄 수 있다. (느낌만)


지금은 웃으며 이 일기를 쓰고 있지만. 사실 이별은 결코 버티기 쉽지 않은 시련이다. 소중한 추억들을 비롯해 갑작스럽게 댕강 잘려나간 상대방과의 미래를 떠올리다 보면 자기 전 베갯잇을 적시는 건 예삿일도 아니다.

하지만 언젠간 괜찮아질 것이다. 사랑 때문에 약해질 때도 있겠지만, 더 강해지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계절이 바뀌어도 그 자리에 있는 아버지의 리틀 포레스트와,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하듯, 모든 일은 다음번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겪는 아픔은 잊어버리기로 했다. 내가 아팠다고 해서, 그 상처를 똑같이 누군가에게 전가할 이기적인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그 아픔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잘 알기에, 다음 사람은 내가 느낀 만큼의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정말 정말 잘해줄 것이라고만 다짐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우리 부모님은 어마 무시하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참. 이래서 정말 이별을 하면 부산에 가족을 만나러 와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낀다.

(방금 그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했더니 엄마가 가만히 지켜보다 또 다음에 내려올 때도 헤어지고 올 생각이냐고 구박한다. 그래서 조그만 목소리로 다짐을 덧붙여 본다. 다음엔 헤어져서 내려오는 게 아니라, 꼭 그 사람과 함께 손을 잡고 내려와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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