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스럽고 숭엄한
어릴 적부터 나는 내 아픈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나누는 편이었다. 한 측면만 본 뒤 매우 많은 것을 파악했다고 여기는 부류가 존재하기에 이런 습관은 그다지 영리한 처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런 이들을 의식했던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숨기고 싶은 것들은 곧 나의 약점이 된다는 생각 때문에 그 치부들을 오히려 노출하고, 그것들의 희소성과 사용 가치를 희석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방어기제'라는 것이 필시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것일 테지.
또 나는 주변 사람들이 기꺼이 그들의 아픈 이야기를 들려주면 기뻐하였다. "기뻐하였다."라는 말은 오해의 여지를 남기 표현이다만... 내가 느낀 희열들의 정체는 아마 인간에 대한 애착 가능성일 것이다. 치부 섞인 생애사를 무기화하는 자들이야 이런 이야기가 잘 이해되지 않겠으나, 나는 고통과 불안과 공포를 견뎌온 동료 인간들의 희곡 속에서 거의 '신성'에 가까운 무언가를 느낀다. 악과 불행을 상대하면서도 스스로는 악당이 되지 않겠노라 다짐한 그들의 대견함과 숭고함!
이 희열 속 어떤 부분은 분명 이 이야기들를 경청할 수 있는 기회 신뢰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기꺼이 누설하기로 한 화자들의 강인함에 대한 경탄으로 되어있을 것이다.
한편 아픔을 떠올리거나 나누는 일 속에도 독소가 숨어있다. 가령 나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고통을 대할 때마다, 동족에 대한 혐오감이 치밀어 오른다. 이 혐오 가능성이야말로 고통 지닌 자들의 투쟁을 양면화하는 요소일 것이다. 스스로가, 그리고 타자들이 겪는 악과 불행들 속에서, 우리는 직간접적으로 그 악과 불행에 손을 묻힌 악의들을 응시한다. 새삼스럽게도 나는 그런 '인간 악마들'의 실존과 그들의 삶의 방식에 매번 새롭게 경악한다.
아마 우리가 타자 혐오에 쉽게 빠지는 이유는, 무리 속에 현실적인 악마들이 실존하기 때문이리라.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기 어렵듯, 악마들의 그 우람한 존재감이 사소한 불편에 대하여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든다. 그러나 악마 혐오가 인간 혐오로 번지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악마 혐오가 또 하나의 악마를 생산하는 데 성공하는 순간이다.
누가 인간을 존엄하다 하였는가.
나는 동족에 대한 혐오가 치밀어 오를 때, 아더 훼릴의 <<전쟁의 기원>>을 떠올린다.* 훼릴은 대오를 갖춰 적군을 마주하는 적대 활동의 기원 파헤쳤다. 이 작품이 전쟁의 시원으로 지적하는 것은 놀랍게도 '사냥 기술'이다. 인간이 협력과 분업을 통해 폭력을 조직하고 효율성을 더하자, 천적들이 사냥감으로 전락하고, 먹이사슬이 재편되었다.
* 이춘근 번역.
그러나 한 부족이 다른 부족과 겨루게 되었을 때, 기술적인 집단 폭력이 군사적인 활동으로 진화했다. 천적을 정복하자마자 동족이 천적으로 전락했다는... 잔혹 동화같은 이야기다. 모든 전쟁/분쟁은 '실익과 수행 능력'이라는 사실 명제 집합 위에 '대적관과 명분'이라는 당위 명제 집합을 덧씌운다.
결국 "인간은 존엄하다."라는 명제도 동일 범주의 '가치 판단'이다. '사실 판단' 속에서 인간은 생각보다 앙상하고 추악하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숭엄해질 수도, 금수보다 잔혹해질 수도 있다.
누가 인간이 존엄한 존재임을 결정하였는가.
누가 이를 입증하였는가.
존엄하다고 말하지 않으면 아니 되어서, 그렇게 말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나는 아픔을 나누고, 그것을 이기며, 스스로 악마화하지 않기로 결단한 이들을 몇 알고 있다. 스스로 결정한 그 정체성을 실천하고, 이로써 자신의 존엄성을 입증한 이들의 서사를. 감사하게도 나는 그런 이들을 몇 알게 되었다. 나는 그들의 삶을 존경하고 지지한다. 이러한 앎이 나에게 큰 위로가 되어준다.
악마를 상대하기 위해 꼭 악마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가능성에 대한 앎. 추락은 결코 필연적인 궤도가 아님을...
선진화된 국가에서도 폭력, 억압, 착취, 세뇌는 발견된다. 물론 이제 식인이나 대량 학살과 같은 극단적 광기를 철책 안에서 다시 찾아 보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표층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거악들에 대하여 허수아비를 세우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무수한 정보들이 사사건건의 사사로운 소악들을 시시각각 실어나르는 지금, 이것들 만으로도 우리 자신에게 염증을 느끼게 만드는 데는 충분하다고 느낀다.
날붙이들 뒤에, 활자들 뒤에, 숫자들 뒤에 늘 "사람"이 있다. 사람에 대한 기대감은 너무나도 커서, 또 쉽게 좌절하게 되고, 잠재적인 손해는 우리 또한 날카롭고 뾰족한 것들을 품고 살아야 한다고 다그친다.
이 역시 고통을 나누는 한 방식이라면, 인간이란 고통을 분산함으로써 유지되는 종족일까. '상처 입힐 능력'과 '흉터에 대한 상호 경례' 속에서 무한히 회전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적인 굴레인가.
이 세계는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것을 정하는 것은 오롯이 우리 자신의 몫이다. '어떤 인간 방식이 얼마나 여럿인지'를 취급하는 정규 분포도 마찬가지이다. '사실'은 결코 "마땅히"의 화법을 구사하지 않는다. 그런 문법은 '인간이나 구사하는 문법'이다. 우리가 취해야 할 존재 방식을 지시해주는 신성한 사실 체계는 없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신성해질 수도 마귀처럼 잔혹해질 수도 있다. 이 역시도 철저한 관점은 아닐 것이다. 신성한 모습도, 추악한 모습도 부분적 측변에 불과할 테지! 하지만 스스로 어떠한 응시하고 넘어서는 결단, 그 한 걸음이 영웅적 희곡을 연출해내는 요소인것 같다.
어쩌면 그저 이렇게 매순간 우리가 찍어대는 자그마한 점들이 쌓여 거대한 천사들과 악마들의 형상을 자아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 인간이란 얼마나 혐오스러울 수 있고, 또 숭엄할 수도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