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사실-가치, 자유의 문제

가치를 결정하는 모든 사실에 반대한다. 그것이 철학이다.

by 임지성의 생각



13세의 내가 이 세상이 전지전능하고 정의롭고 자비로운 신의 활동 무대라는 식의 설명을 거부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이 설명이 내가 직면한 실존 세계와 정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설명에서 제시한 modus operandi dei 는 "악의 문제"를 직면하면 즉시 격파되고, 이후에 부연되는 보조 가설들은 모두 ad hoc이 된다.


16세의 내가 다시 종교에 귀의했던 것은 그 ad hoc들이 사실과 윤리와 미학을 일관되게 포섭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중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쳐 준 교사의 유물론과 그 방법론적 기초였던 토대주의적 환원론보다는 '신비 영역'을 허용하는 유신론의 체계가 덜 의심스러웠다.


통합된 진선미를 포함하며 연역과 경험이 항상 일치할 수 있는 방법을 갖춘, 그런 체계를 찾았던 것이다.


고등학교 때 읽었던 플라톤의 <<국가론>>에도 흡족했던 것도 같은 이유였던 것 같다. 하지만 플라톤의 세계관은 한 인격이 가치를 인식하는 방식을 지나치게 추상화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라리 장 칼뱅의 체계가 더 흥미로웠던 것이다.

칼뱅의 작업은 개신교 전통에서, 특히 장로교 전통에서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진다. 철학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니체를 극복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 것처럼, 사회 이론이 마르크스와 스팬서를 극복하는 것을 과제 삼는 것처럼, 개신교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루터, 칼뱅을 극복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25세의 내가 칼뱅의 체계를 포기한 것은 다시 신학의 ad hoc보다 과학자들의 ad hoc이 '사실'에 관하여 많은 것을 알게 해준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실을 결정하는 그 어떤 방법도 가치를 결정하지 못한다는 사실의 대발견. '두 세계가 철저히 통합될 수 있는, 그런 체계 따위는 있을 수 없다.'라는 인식. '인식적 가치'와 '가치 인식' 중 어느 하나도 다른 한 편을 포괄하지 못하며 오히려 상호내포적 순환과 운동만이 있다는 깨달음.


이것이 내 짧은 공부 전부의 요약이다.


연구 결과가 사실에 관하여 떠든다면, 그렇다면 '가치'는? 그것은 누가 알려주는가?


윤리학이나 정치 사상을 떠드는 철학도들? 그들이 떠드는 것은 지식인가, 주장인가?


정량적인 자료를 생산하는 과학 비슷한 것들 연구하는 학술 공동체?

예를 들면, 심리학, 뇌 과학, 설문지법이나 통계 연구에 의존하는 사회학도들?


주장은 지식이 되기를 원하고, 지식이 된 것은 사실에 관하여 지위를 갖는다. 그러나 사실과 유착할 수록 명제들은 당위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흄의 말대로, 사실은 당위를 지시하지 않으니 말이다. 무엇을 수치로 보여주든, 논증으로 보여주든 귀착은 동일하다.


그렇다면 '가치'라는 영역의 담론은 실존주의자들의 "저항", 니체 제자들의 "권력 의지"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하버마스 식의 "더 나은 주장의 힘"? 비판 이론가들이 좋아하는 "은폐된 이데올로기의 작동"?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하여는 침묵하라."


정작 이 문장의 장본인이 '말할 수 있는 것'들을 정리하는 일보다 '말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하여 생각하고 보여주는 일이 어렵고 또 중요하다고 생각한 점 무척 인상 깊다.


이것을 나는 내 일생일대의 과업으로 느낀다. 상념과 감상은 철학인의 자세가 아니다. 나는 플로티노스의 길을 따르는 내향인의 철학에 환멸을 느낀다.


철학은 '자유'에 관한 수다과 실천이어야 한다. 자유는 어떻게 인식되고 실천되는가. 이것을 활달하고 유쾌하게 떠드는 활동이어야 한다.


무엇이 결정하는 지위를 가졌는가.


양자역학 이론에서 파생된 새로운 형이상학인가? '다세계 이론'이나 '평행우주론'? 기계적 결정론을 확률적 결정론으로 바꾸면 '자유'는 확립되는가?


신경 발화가 구체적인 인지와 행동에 선행한다는 연구 결과는 '자유의지'를 확실하게 죽였는가?


"자산의 크기가 자유의 크기를 결정해준다"는 식의 종교적 페티시즘 교리는 어떠한가?


Nein!


Nein!


Nein!


오히려 인간은 생각과 행동을 대신 결정해준다는 모든 법칙들, 설명들, 모형들 보다 한 없이 더 높은 곳에서 그것들을 응시하고 조소한다. 왜냐하면 의지는 선험적인 변수를 발견할 때마다 그것에 반항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변수들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많으면 많을 수록 그러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될 것이다.", "그래야 한다." 등 명령문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이를 위한 지독한 논증과 전술적인 응시. 철학의 목표는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자가 되는 것이다.


각자의 눈과 손에 자유를, 서로의 눈과 팔에 의지를!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하여는 침묵하라. 그러나 모든 '바깥에서 결정된 modus operandi들'을 침묵시키기 위하여는 부지런히 주둥아리를 털자. 아니, 떠들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냥 보여주도록 하자!


디오게네스의 후예라고 조롱 당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교양이 자유인이 되기 위한 연습이라면, 철학은 자유인으로서의 삶 그 자체다. 사실 주장으로 위장한 가치 주장들을 찾아내고 그것들과 있는 힘껏 다투는 것. 이것이 모든 형이상학과 비판 이론의 가장 큰 강령이다.


"진리를 말하고 활을 잘 쏘는 것, 그것이 페르시아인의 미덕이다."


발견된 운명에 대한 성실한 부정, 이 '부정성'에 대한 지독한 헌신. 이 작업은 영원히 중단되지 않는다. 모든 자유로운 존재가 멸종하기 전까지는!


하나님(편견)한테 악플 달고 과학(상식)이랑 기싸움하는 것. 그것이 곧 사유다.


"명령하지 마라."


무슨 교리를 말하든 그것은 나와 당신과 우리의 세상과 삶을 결정하지 못한다. 이것이 30세의 내가 운명과 자유의 대립, 사실과 가치의 전쟁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사유하는 자의 삶은, 반사실적 투쟁 한 가운데서 움직이는 행군대열에의 참여이다.




그나저나 '의사소통의 문제'(공약 불가능성)와 관련하여는 뒤엠-콰인, 하버마스, 푸코 뿐만이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의 '통증어'와 '색채어'에 관한 통찰(사적 언어 논증)을 반드시 참고해야 한다. 이것을 잊지 말도록!

사실은 가치를, 가치는 사실을 미묘한 방식으로 포함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귀착한 유아론의 문제나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제시하는 이해의 선구조 문제와도 맥이 통하는 지점인 듯하다.

세계는 나를 담고있고, 언어도 나를 담고 있으며, 나도 언어를 담고 있어서 그것을 풀어주기도 계속 담아두기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내가 담고 있었던 세계를 계속 담아두기도 하고 어느 정도 열어 흘리기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하는 존재가 나 이외에 여럿 있다는 것은, 내가 담아들이는 세계의 존재 방식 중 많은 부분들이 누군가 세계를 놓아주는 방식을 통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와 언어와 자아와 타자의 상호내포적 관계를 그림으로 묘사하려면 분명 위상수학적인 비틀림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상호 순환적 포함 관계가 기독교 전통의 삼위일체교리를 예증하는 모형 중, '페리코레시스 모형'에서 가장 잘 표현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추에 지나치게 집착하다 보면 현학적 형이상학에 도착하게 될 테지.



자유는 이러한 결정 방식을 응시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이것 역시 잊지 말도록!

아무튼 가다머와 리쾨르도 비트겐슈타인을 여러 방식으로 호평했다고 하는데 가다머가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논증'을 어떻게 평가했을지가 궁금하다. // 하버마스의 <<진리와 정당화>>가 분석철학을 평가하는 방식이 어떠했는지도 참고해볼만 할 듯. // 잊지 말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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