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자유의 변증법과 주객의 철학

긍정과 부정의 동일성

by 임지성의 생각



해석학에서 강조하는 역사성도 일종의 사실 기술에 머무를 수 있다. 믿음의 해석학도, 의심의 해석학도 현존재(해석적인 실존으로서의 인간)가 이해의 선구조 안에서, 과거 전통과 변혁적인 대화 과정을 통해 현재를 생성해 나감을 동일하게 말한다.


다만 한편에서는 언어의 세계 개시성 자체가 역사의 폐쇄적인 구조 자체를 극복할 수 없다고 말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그 과정 속에서 표층화되는 전통이 항상 그 심부 속에 무언가를 은폐하거나 배제함으로써, 혹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다른 가면을 내세움으로써 자신을 유지한다는 모순을 고발할 뿐이다. 전통과 권위에 반항적인 태도가 역사성의 극복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역사성의 필연적인 구조가 늘 순진한 계승과 용인하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가다머와 하버마스의 승자 없는 논쟁이 위와 같은 관계를 예증한다. 하버마스는 가다머의 전통 안에서 수행되는 지평 융합이 과거를 계승하는 방식을 잘 묘사하더라도 전통의 모순을 발견하는 데는 게으르다며 공격했지만, 가다머는 하버마스가 예시로 든 정신 분석도, 또 그가 궁극적으로 강조하고 싶은 비판적인 사회과학의 역할도, 결국 더 큰 영향사 안에서 서로 다른 부분적 영향사들 간의 대화일 뿐이라며 받아쳤다.


다른 사례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헤겔의 절대지를 거부하고 주체 중심의 변증법을 발전시키며 전통을 비판하는 주체의 능력을 강조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전통의 역사성을 강조하며 권위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던 푸코의 경우, 주체 역시 역사적임을 놓치지 않고 지적하였다. 오히려 푸코는 헤겔식의 절대지나 프랑크푸르트식 합리성 같은 것을 모두 단호히 거부하겠지만, 오히려 주객동일의 관점에서만 보면 프랑크푸르트 학파보다 푸코가 더 헤겔적이다. (물론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가다머와 하버마스처럼 대결한 것은 아니다.)


역사성은 계승적으로도, 비판적으로도 인식될 수 있으며, 주체를 앞세우든, 아니면 그것을 약화시키든, 그 역시 적용 단계에서는 보수적으로 실천될 수도, 진보적으로 실천될 수도 있다. 결정론과 자유의지론 사이의 대결, 양립가능론의 구체적 실천 방향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모순과 역설의 긍정이야 말로 부정의 변증법의 진수다. 비판 이론이 "Negativit'a't"의 관점만을 떠든다며 비난하는 이들조차 자신들이 주도하거나 편승하려는 "사실성/현실성/긍정성(positivism)"을 통해 다른 것을 음지화하고, 주변부화한다. (게다가 실증학문만이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비판적인 관점은 그들이 배제하고 은폐하려는 것들을 탈은폐하고 폭로하며 비판하려는 정반대의 사실성과 현실성을 지향(긍정)한다.


부분으로서 전체를 포괄하지 못하는 이 운명, 이 운명 때문에 우리는 결코 모든 것을 긍정하거나 모든 것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운명과 자유는 동어반복이다.


실재와 허무도 동어반복이다.


어느 하나를 긍정하느라 다른 것을 부정하게 되고, 한계를 만나면 그 영역을 떠나는 새로운 부정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 역시도 새 영역 안에서는 창조이며 긍정인 것이다. 모든 이항대립이 파르마콘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이러한 역설에 관하여 헤겔과 니체는 하나이고, 가다머와 데리다도 하나이다.


생각해보면 포스트모던 태제들은 모더니즘, 그러니까, 서구 계몽주의가 서구 크리스텐덤에 대하여 했던 의심과 해체와 해방을 서구 계몽주의에게 되돌려주는 과정에 불과하다.


모든 것이 동일하다면,

그것을 핑계로 체념할 수도 오히려 무언가를 결단할 수도 있다.


결정론적 세계관에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나를 주체적이지 않게 만들거나 자유롭게 만들지 못하지도 않는다.


내가 의지적으로 실천하는 것들이 내 신체의 수준에서, 환경의 수준에서, 문화의 수준에서 결정되어 내려왔을지라도, 내가 내 사고와 행동 이면에 어떤 충동과 정동을 지녔을지라도, 내가 그 충동과 성향을 흘려보낼 수도 있고, 통제할 수도 있을지라도, 그것은 결정된 관점에서 봐야만 결정적인 과정며, 결정되지 않은 차원 안에서는 철저히 열린 과정이다.


내 의지는 구성 요소들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큰 맥락에서 왔던 것들이 내 의지 안에서는 부분집합들이 된다. 내 의지는 내 의지 수준에서는 이것들을 포괄하는 전체집합인 것이다.


결론.


한 없이 부분적일지라도, 끝내 지배하기보다는 지배당할지라도, 부단한 응시를 통해 참여 하는 것, 그것이 곧 자유다.


반사실성의 행군은 사실을 부정하는 여정이기보다는, 정직하고 부지런한 방식으로 사실을 다루는 가치 투쟁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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