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소중함 vs 새로운 도전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이상과 현실이 충돌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내가 현실에 만족할 수 있는 타입인지, 아니면 못 다 이룬 이상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서 한 번은 꼭 추구해 봐야겠다 하는 성격인지 고민해보게 하는 영화다.
간략히 줄거리를 설명하자면,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은 첫눈에 반해 결혼을 한 커플이다. 교외 지역에 가정을 꾸린 둘은 평안하고 잔잔한 일상을 함께 한다. 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일상, 지루한 반복, 변화 없이 잔잔한 삶에 둘은 다투는 날들이 잦아진다. 그러던 와중 에이프릴은 옛날의 꿈이었던 파리에서의 이민을 꿈꾸기 시작하고, 프랭크의 동의를 얻어낸다. 파리로의 이민을 위한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갈 때, 예기치 못하게 프랭크는 승진 제안을 받게 되고, 에이프릴은 임신을 하게 된다. 현재에 머무르자는 프랭크와, 파리로 떠나자는 에이프릴은 결국 격한 다툼을 하게 되고, 결말은.. 다소 슬프고 충격적이니 영화의 마지막에서 확인하시길.
이게 인생의 전부일리는 없어
뭔가 더 새로운 걸 쫓고 싶은 에이프릴의 마음이었을게다. 평생의 꿈이었던 파리에서의 삶을 실행하기에 지금만큼 좋은 시기는 없다고 생각했던 그녀. 그리고 딱히 무모한 도전도 아니었다. 프랭크의 입장에서도 좋은 제안이었을 테고. 자기가 일을 하면서 돈을 벌테니, 그 시간동안 하고 싶은 일을 찾으라는 아내의 제안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일상의 소소함에 대해 무료함을 느끼는 정도는 사람마다 많이 차이가 날 것이다. 기질 검사만 해봐도 알 수 있는데, 크게는 '자극추구형'과 '안정추구형'으로 나뉜다. 나는 안정추구형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자란 자극추구형 인간이다. 나는 항상 집에서 '엉뚱한 사람'으로 불려 왔고, 그 영향에서인지 내가 이상한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보내온 시간도 있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는 선택지를 좁히고,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친구가 '가능성 중독'이라고 명명한 이 심리는, 나는 뭐든 될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다는 열린 가능성들 때문에 오히려 더 불안하고 초조한 상태이다. 남들의 삶을 훨씬 더 밀접하게,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요즘이기에 우리는 이 가능성 중독에 빠지기 쉽다.
지금까지 살아오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계속 유지하면서 일상의 소소함과 행복을 찾는 것은 개인적으로 정말 축복받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에 다양한 선택지와 길이 있다는 걸 알지만,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알고, 아낄 줄 아는 사람들이다. 반면,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과 꿈이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아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아직 이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언젠가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 목소리를 잠재우며 현재의 삶에서 만족을 찾을 것인지, 아니면 용기를 내서 그 미련을 해소하기 위해 발을 내딛을 것인지를 말이다.
영화 속 에이프릴의 마음에 공감하다 못해 동화되었다. 어찌 보면 나는 단기적인 쾌락에 젖어 살아가고 있었던 것 같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출퇴근하고, 회사 복지 좋고, 가끔 저녁 약속도 있고, 나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아기자기한 방도 있고, 당시는 연애도 하고 있었고, 넷플릭스와 유튜브에는 재밌는 콘텐츠가 넘쳐나고, 돈도 따박 따박 들어오니까 이 돈 잘 굴려서 재테크 잘해보면 될 것 같고, 주말마다 핫플 놀러 다니거나 쇼핑하면서 돈 버느라 수고한 나에게 보상도 해주고, 연락할 친구들도 많고. 행복하려면 행복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항상 뭔가 붕 떠있는 기분이었다. 마음이 텅 비어있었다는 게 맞는 것 같다.
내가 여기 정착하는 게 맞을까? 이 길이 맞을까? 하는 고민은 계속 있었던 것 같은데,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그때도 나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하루하루는 정말 느리게 가는데, 일주일, 한 달, 일 년은 쏜살같이 지나가는 직장인의 삶을 살다 보니 어느새 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있었다.
자기 계발이라는 명목 하에 책도 읽고, 글도 쓰고, 모임도 나가고, 운동도 하고, 언어도 배우고, 그 남아도는 젊은 에너지를 뭔가 생산적인 것에 쓰고 싶어서 애쓰던 시간들이 있었다. 내가 가진 에너지가 100이라면 그래도 30 정도는 나의 개발을 위해 써야지, 라며 이것저것 뒤적뒤적거렸다. 벌어들인 월급은 간혹 해외여행 같이 마약 같은 위로의 형태로 나를 달래주며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하는 편안한 메시지를 보내왔다.
정말 중요한 문제, 내가 나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봐야 하는 질문을 외면하며 ‘난 할 수 없을 거야’라는 타성에 젖어 살았던 시기였다. 부끄럽지만 ‘연인이 나를 구해줄 거야’와 같은 안일한 생각을 하며 연애에 몰두하기도 했다. 아침에 눈 뜨면 ‘오늘은 이거 이거 다 해야지!’라고 하다가도, 퇴근하고 나면 온몸에 기운이 쭉 빠져, ‘오늘 열심히 일한 나, 수고했다’ 하며 흘러넘치는 각종 재밌는 콘텐츠에 에너지와 시간을 소모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면은 점점 텅 비어갔고, 시간이 갈수록 나아지는 게 아니라 초조해지기만 했다.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는데도 감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희망 버리기 기술>과 <신경 끄기의 기술>을 쓴 작가 마크 맨슨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진짜 문제는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게 아니다. 문제는 ‘뭘 포기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거다. - <신경 끄기의 기술>, p.7
좋은 삶을 살려면, 더 많이 신경 쓸 게 아니라, 더 적게 신경 써야 한다. 요컨대, 오로지 코 앞에 있는 진짜 중요한 문제에만 신경을 쓰라는 말이다. - <신경 끄기의 기술>, p.18
당신이 ‘세속적 성공’이라는 가치의 기준을 ‘비싼 집과 멋진 차를 구입하기’로 정한다면, 그리고 그걸 위해 20년 동안 뼈 빠지게 일한다면, 그걸 달성하자마자 당신의 기준은 아무런 쓸모가 없어진다. 그리고 곧장 중년의 위기가 닥칠 것이다. - <신경 끄기의 기술>, p.190
손에 쥐고 있는 걸 놓지 않으면, 새로운 길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내가 그랬다. 목표가 불분명하고,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으니, 그 목표를 쫓으면서도 불안감이 수반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 욕구가 온전히 나의 것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걸 먼지처럼 에워싸고 있는 각종 사회적, 조직적 압력들을 씻어봐야 한다. 영화 속 에이프릴과 프랭크는 결국 한 사람의 마음속 '이상'과 '현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서는, 에이프릴이 강한지 프랭크가 강한지 한 번쯤 들여다보게 해주는 씁쓸하면서도 깊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