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이렇게 벌어서 어디다가 쓰게
어릴 적부터 용돈을 받아 생활했다. 매년 말 가족회의에서 부모님과 언니와 함께 모여 용돈 인상(?) 협상과 심부름값 협상을 진행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잔고를 늘리는 것의 즐거움을 배웠던 것 같다. 500원으로 컵떡볶이를 먹을 수 있던 시절, 간식값도 아껴가며 코 묻은 돈을 조금씩 저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내가 그냥 컵떡볶이 하나 더 사 먹었으면 싶다.
연세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지역장학생으로 선정되어 학기마다 500만 원씩 총 2천만 원을 장학금으로 수여받았다. 가난한 대학생에게는 의심할 여지없이 큰돈이었지만, 그 돈을 감히 한 푼도 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옆에서 부모님이 그 돈은 안 쓰는 게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씀하신 영향도 크다. 나중에 결혼자금으로 쓰라고 했던가, 정확한 문장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그 돈은 건드리면 안 되는 최후의 보루같이 느껴졌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통장에 따박따박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돈을 벌기 시작한 주변 친구들은 하나 둘 "나 이번에 벤츠 뽑았다", "나 이번에 신축 오피스텔로 이사한다", "나 이번에 명품가방 살 건데 좀 봐주라" 하며 하나 둘 씀씀이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런 환경에서도 나는 쉽사리 돈을 쓰는 것이 어렵게만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만큼의 돈을 쓰는 건 아직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돈 자랑을 하는 느낌의 대화가 불편해지기 시작했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친구들과 더 어울리기 시작했다.
배달음식은 거의 시켜 먹지 않았고, 값비싼 옷도 액세서리도 사지 않았다. 술을 많이 먹는 친구들과의 모임 자리에는 N빵을 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발걸음이 뜸해졌다. 디저트나 간식은 의식적으로 줄였고, 카페를 가기보다는 공원에서 물을 마시며 책을 읽는 게 일상이었다. 회사 근처에서 가장 저렴한 월세 25만 원짜리 노후화된 오피스텔에서 생활했다. 가끔은 버스비도 아까워서 운동 겸 따릉이를 타고 다녔다. 운동 등록하는 비용도 비싸다고 느껴서 집에서 주로 홈트를 했다. '김생민의 영수증 찍냐'는 소리를 듣는 게 기분이 좋았고 쇼핑 사이트 대신 주식창을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렇게 천만 원이 1억이 되고, 계속 숫자가 불어나는 걸 보는 재미로 살았던 시기가 있다.
나에게 있어 돈이라는 건 절대 줄어들면 안 되는 것이었다. 마이너스라는 건 생각도 안 해봤고, 번 돈의 최소 50%는 무조건 저축, 남은 돈은 투자로 불려 나가며 가치가 줄어드는 소비재에는 돈을 쓰면 안 된다는 생각이 박혀있었다. 당연히 돈 먹는 하마(?)라고 불리는 자동차를 살 생각은 한 적이 없고, 항상 자취하면 키우고 싶던 고양이도 돈이 많이 들 거라는 이유로 미루고 또 미뤘다. 옆에서 부모님이 자꾸만 뭐든 "결혼하면 사라"라고 말씀하신 것도 큰 영향이었다.
직장인들의 커뮤니티 블라인드에는 가끔 이런 글들이 올라온다.
“결혼 조건 평가 좀. 나는 30초 남, 실수령 xx, 모아놓은 돈 xxx, 부모님 노후 준비 완료, 키 xxx, 몸무게 xx, 자차 o, 부동산 o"
그러면 얼굴도 본 적 없는 익명의 사람들이 마음대로 스펙을 판단해 준다. 그런 글들을 보면서 솔직히 '나 정도면 많이 모은 편인 것 같다', 하고 위안을 얻기도 했다. 돈을 쓰려고 모으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랭킹(?)을 올리기 위한 게임머니 같이 대했다. 그렇게 내가 맘 편히 쓰지도 못할 돈을, 얼굴도 모르고 존재할지도 모를 내 미래의 남편과의 결혼생활을 위해 꾸역꾸역 모아나갔다.
이렇게 모아서 언젠가는 차도 사고 집도 사고 하면 행복하겠지, 했지만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로부터 "나는 결혼생각 없는데"라는 소리를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잠깐, 애초에 내가 결혼을 하고 싶어 했던가?
진짜 같아 보였지만 실제로는 가짜 이유였던 '결혼'이 이별과 함께 사라지자 내가 정말 돈을 쓰고 싶어 했던 분야를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평생 나와 언니를 위해 돈을 벌고 아끼고 저축하셨다고 생각하니, 나도 똑같이 (존재할지도 모를) 나의 다음 세대를 위해 무작정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는 나의 세계를 넓히고, 나의 배움에 건강에 투자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10만 원짜리 재킷을 사는 데에도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던 사람이었지만 이제까지 모은 전재산을 나한테 올인하겠다는 생각은 그냥 옳다고 느껴졌다.
진심으로 확신을 갖고 있는 목적 없이 돈만 모으다 보면 어느 순간 '돈 버는 기계'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 내가 딱 그랬고, 함정에 갇혀버린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막상 학원을 끊고, 수강료를 지불하고, 시험비용을 결제하고, 비행기표를 예약하면서 나에게 돈을 쓸 줄 아는 것도 훈련이고 꾸준히 연습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부장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와이프를 생각하면 가끔은 좀 구질구질한 거 같아. 이런 생각하니까 좀 나쁘게 느껴지네, 가정을 위해서 돈을 절약하는 건 고맙지, 그래. 근데 가끔은 예쁜 옷도 사 입고 놀러도 나가고 그랬으면 좋겠더라고." 구질구질. 부장님 마음도, 와이프분 마음도 이해가 돼서 좀 슬픈 대화였다.
여행을 하면서 한 50대 부부를 만난 적이 있다. 두 분은 그 옛날 신혼 때도 직장을 그만두고 같이 1년 동안 남미 여행을 가신 경험이 있으셨단다. 그리고 지금도 50살이 된 기념으로 퇴사를 하고 다시 1년 동안 중미를 여행할 계획을 갖고 계시단다. 멋있었다. "주변에서 걱정하지 않으셨어요?"라고 물으니 "당연히 걱정했죠. 근데 그런 거 일일이 들어줄 시간 없더라고. 어차피 부모님은 언제나 걱정하시는 분들이고, 우리는 지금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나온 거니까. 50대에 재취업할 생각 하면 좀 갑갑하기도 한데, 돈은 또 벌 수 있는 거고. 우리는 그냥 이렇게 나와야 되는 사람들인 거야." 주변 사람들이 뭐라 하든 자신이 진정으로 가치를 느끼는 곳에 돈을 쓰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은 꽤나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나도 이제 그렇게 살아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