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혜진 Jean Seo Oct 21. 2023

'야누스' 마더링

엄마의 ‘마더링’ (또는 자녀교육)이 잘 되려면, - 그 목적이 공부를 잘하는 아이로 양육하기 위함이든, 스스로 독립할 정도로 성숙하는 것이든 - 소위, 엄마랑 아이가 '사이가 좋아야' 한다. 자녀의 생각과 감정을 주의 깊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필요할 때 지침을 제공하는 훈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사랑한다는 부모가 아이와 대화가 어렵다면 그 보다 힘든 일이 없을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의 증거는 ‘친밀함’ 이기 때문이며, 그 척도는 아이와 엄마와의 ‘관계성’의 정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녀교육의 필수적인 토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엄마가 스스로의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다. 특별히 일상에서 예상치 못한 난감한 상황을 마주쳤을 때, 엄마가 보이는 감정적인 반응은 마더링에 가장 큰 장애물이다. 사실, 우리 엄마들은 자신이 자녀를 더 많이 사랑하는 듯 착각(?)한다. 때로는 오히려 아이들이 엄마를 더 사랑하고 의지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자녀가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학교 성적이나 공부가 별 영향을 드러내지 않을 때까지)는 아이들은 엄마가 원하는 것에 잘 순응한다. 엄마의 부정적인 감정표현에도 엄마에게 매달리며 사랑을 갈구하는 듯 보이는 시기가 이때까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중학교 자녀를 둔 엄마들로부터 “우리 애(주로, 중 2)는 엄마 성미를 건드릴 수 있는 건 다 찾아서 하는 것 같아요”, “우리 아이가 사춘기라서 요즘 대면대면하고 말을 안 해요”, “공부요? 공부얘기는 고사하고, 얘한테 말도 못 붙이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인지 몰라요”라는 얘기는 이미 너무 흔한 넋두리이다. (어쩌면 공부얘기가 하기 싫어서 엄마와의 대화를 그만두었을는지도 모르겠다. 진짜로, 중학교 2학년부터 시작되는 학교시험의 위력은 대단하다)

 





현장에서 만나는 엄마들로부터 듣는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는 자녀와 공부에 관한 대화를 못하기 때문에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할 정도이다. 사교육 선생님들은 엄마가 할 말을 대신 전달해 주는 ‘통역사’의 역할수행 때문에 그렇게 번성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녀의 성적을 올리려고 보내는 것이 ‘사교육’이다. 그런데, 성적이 잘 나오든 안 나오든 자녀를 계속 학원을 보낸다. 어느 학원이라도 ‘아이가 학원 안 다니겠다’라는 말만 안 하면 좋겠다고 이야기도 한다. 마치, 사교육을 통하지 않고는 자녀와 ‘공부’ 관련해서는 대화를 나누기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 나아가 '사감'선생님(?) 역할도 위임한다. “제가 말하면 안 듣거든요.. 선생님이 OO한테 집에 좀 일찍 들어오라고 얘기 좀 해주세요”, "엄마 말 좀 들으라고 얘기 좀 해주세요", "게임 좀 그만하라고 얘기 좀 해주세요"라는 얘기까지 통역(?)을 부탁한다. 마치 엄마와 자녀, 때로는 아빠까지, 가족 모두가 각각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다른 민족 출신들처럼…. “얘가 밤새 핸드폰을 하는 것 같은데, 문을 잠그고 있어서 얘기해도 소용이 없어요. 아빠한테 말하라고 했더니 얘한테 너무 심하게 소리쳐서 듣는 내가 또 덩달아 짜증이 나더라고요. 나한테 들으라고 하는 얘긴가? 하는 부분도 생기고..”. 

 





엄마는 자녀가 공부를 잘하고 자기 앞길을 잘 찾아나가기를 원한다고 얘기한다. 또한,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교육에서의 최선을 선택하기 위한 온갖 노력을 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엄마의 마더링의 결과인 자녀의 성적이 기대에 못 미칠 때, 정작 학습에 제일 중요한 멘탈을 부숴버리는 실수를 엄마가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동안 잘 참으며, 높고 튼튼하게 쌓아왔던 '정서적 지지'를 한, 두 번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한번에 무너트리는 경우도 많다. 교육적 성취가 마더링의 주된 목적이 되어버린 한국에서는 누구나 경험하기 쉬운 일이다. 오랜 사교육현장에서의 경험을 통해볼 때, 아이와 엄마의 사이가 좋은 경우(그 기준은 좀 애매하지만) 아이가 공부를 잘할 확률이 높다는 개인적 확신이 있다. 반면, 대부분의 경우에서는 이미 공부에 질려버린 일부 아이들은 중학교에 올라가기도 전에 엄마가 드러내 보인 감정의 민낯을 경험해 버린다. 자녀의 성적을 위해서 (더 나아가 화목한 관계를 위해서든), 엄마가 자신의 감정을 정제없이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특히, 성적때문이라면 자녀들은 그동안 엄마에게 받았던 애정에 배신감을 느낀다. 그래서 공부잘하는 자녀를 얻고 싶다면, 자녀와의 정서적 ‘친밀감’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공부에 가장 중요한 것이 아이들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자녀가 공부를 잘하기를 원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엄마의 감정이 ‘엄마노릇(mothering practice)’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에 신중해야 한다.

 





로마의 최고신으로 모시는 '야누스'는 '경계선을 지키는 신'이자 '문을 여는 신', 곧 모든 사물과 계절의 시초를 주재하는 신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래서 영어로 ‘1월’(January)과 ‘문지기·수위’(janitor)는 '야누스'(Janus)에서 왔다) 각기 반대 방향을 바라보는 두 얼굴 때문에 앞면과 뒷면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의 양면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야누스’라는 말을 겉과 속이 다른 이중인격자를 가리키는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한다. 이 두 얼굴이 공간적으로는 문의 앞과 뒤를,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기 위함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처럼, 이중적 성격을 지닌 '야누스'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징한다. '야누스'가 균형과 이중성의 개념을 구현하는 의미의 은유로 사용되었다면, 자녀를 양육하는 것도 ‘야누스’의 특성을 가진다 하겠다. 엄마는 사랑과 규율, 독립성과 지도, 자유와 안전 사이에서 섬세한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육아의 복잡성을 '수호신'처럼 잘 헤쳐나가는 엄마의 역할에 긍정적인 은유로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야누스'의 부정적의미는 어떤가? 이미 살펴본 대로, '야누스'는 집이나 도시 출입구 등 주로 '문'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했다. '문'은 '시작'을 나타내며, 모든 사물과 계절의 시초를 주관하는 신으로 숭배되었다 (물론, 나는 크리스천이라 이런 '신'들의 이야기에 그다지 진심은 아니다). 아마도 너무나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신'으로 숭배했었으리라.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에서 인식되는 '야누스'는 앞면과 뒷면이 다른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이중성의 부정적 의미의 상징으로 많이 사용된다. 마치, '모성애'의 숭고했던 이미지가, '출산'과 '여성의 삶의 굴레'등의 부정적인 의미로 바뀌어버린 현실과 묘한 일치를 보이는 것에 씁쓸함마저 느껴진다. 

 





내 자녀에게 엄마의 마더링이 어느 모습의 '야누스'로 인식되는지의 갈림길은 엄마의 순간적인 감정표현이다. 그리고, 자녀에게 표현된 감정적인 반응 중, 가장 파괴적인 것은 ‘성적’과 관련한 분노의 표현이다. 이것은 한두 번 만으로도 엄마에게 적대감을 가지게 하는 결정적인 파급효과를 가진다. 물론, 엄마의 억울한 지점은 원인의 제공자인 '그분들'이 오히려 더 '당당'하다는 점이다. 엄마들 입장에서는 공부라는 것이 과정이 있어야 결과가 나오는 것인데, '그분들'은 과정이 없었기에 결과를 안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화를 내는 요건을 갖춘 것이라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도 할 만큼 했다며 '박박' 우겨대며, '엄마가 뭘 아느냐?'며 대든다. 여기서 엄마의 '분노'가 생긴다. 사실, 자녀의 안녕과 성공을 위해 정보와 이성, 감성에 입각한 결정을 내리려면 상황의 다양한 면을 모두 살펴봐야 한다. 그런데, 엄마의 '분노'의 감정은 이성을 흐리게 한다. 상황을 명확하게 볼 수 없다. 어떤 정도의 통제력으로든 이미 올라가버린 분노의 '게이지'로인해, 그것에 대한 스스로의 대응을 준비하고 반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춘기에 들어선 자녀와의 갈등상황은 모든 엄마들이 반드시 경험하는 것이다. 전 인격적으로 엄마를 향한 ‘거부’를 표현하는 자녀를 대할 때면, “사랑은 오래 참고…”라는 것은 참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왜 이렇게까지 된 걸까? 상담을 하다 보면, 불과 1년 전만 해도 '엄마옆에 와서 같이 자겠다'고까지 하던 아들이 이젠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는 것은 당연하고, '말도 시키지 말라'라고 한다는 엄마들의 속 타는 푸념을 많이 듣게 된다. 내용은 다르지만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들은 엄마들 사이에서 넘치고 흘러내릴 정도이다. '내 아이가 이럴 줄 몰랐다'는 이야기는 단골손님이다. 자녀와의 '관계성'때문에 힘들어하는 엄마들의 주된 변명 아닌 진단법(?)이 "사춘기라서 그런다"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나는 자녀와의 관계성 문제의 대부분은 꼭 그럴 수 밖에 없는 인과관계가 아닌 경우도 많다. '사춘기여서 그럴 수밖에 없다'의 대표주자(?)인 중학교 2~3학년의 아이들이 엄마와의 갈등을 시작하는 경우도 대부분 공부인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그렇다고 한국처럼 마더링의 시작과 끝이 온통 "교육"일 정도로, 이렇게 학벌과 자녀의 성적에 진심인 나라에서 어떻게 자녀에게 '공부'얘기를 안 하고 살 수 있나? 아무리 '사교육 없이도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다'는 말을 수도 없이 연구논문을 증거로 보여줘도 결국 중, 고등학생을 둔 가정의 평화(?)는 '아이들의 성적표로 금이 가기 시작한다. (자녀의 첫 성적표로 온 부모의 '현타'이야기는 너무 많이 들었다) '사교육 없이 성공한 엄마'들의 생생한 간증(?)들을 마르고 닳도록 들어도 모두 '남의 집'얘기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어떻게든 이 시기가 잘 지나가기를 기도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소위, '당근과 채찍'을 잘 사용하는 '전략적 엄마들'의 '생생한 간증'들은 엄마들 모임에만 나가도 쉽사리 들을 수 있다. 비록 '내가 따라 하기는 쉽지 않다'는 그 찹찹한 기분 때문에 오늘도 엄마인 우리들은 괜스레 '대치동'맘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부터 '유튜브'에 있는 전설적인 엄마들의 교육법을 찾아본다. 그러나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교육법'이라 하더라도 '그분들'의 '협조'없이는 성과를 낼 수 없는데, '이분들'이 오늘도 말도 없이 '학원'을 빠졌다는 전화를 받거나, 시험이 내일모레인데도 '오늘은 친구랑 조금만 놀고(?) 오시겠다'라고 한다.(사실, 어제도 말없이 늦게 와서 말다툼을 했는데.. 그다지 염두에 두지도 않는구나라는 무기력감이 든다고 한다) 그나마 이 정도는 괜찮다. 이번 시험을 잘 볼 테니, 아이패드를 사달라는 '협박'과 '거래'를 또 시작한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공부할 터이니 '뭐뭐'를 해달라는 아이들의 '민원'은 참 창의적이기도 하다. 이 모든 상황은 조금의 '디테일'(detail)이 다를 뿐, 우리 한국 엄마의 마더링에서 일상처럼 되어버린지 이미 오래다. 엄마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때로는 자녀의 부주의함으로 생기는 사소한 일들이 넘쳐난다. 특히, 엄마가 상황을 조절할 수 없도록 만드는 사건으로 (요즘은 십 대 청소년의 술, 담배도 흔하다) 결국 '분노'하게 만드는 자녀를 대할 때 그 어느 '우아한' 엄마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어느 때는 사랑을 꾸며 내는 '주작'이 훨씬 할만하다고 생각되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와의 ‘친밀감’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마더링의 시작과 끝이라고 말하고 싶다. 엄마는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에 신중해야 하며, 어떤 방식으로든 엄마의 감정이 ‘엄마노릇(mothering practice)’에 영향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도 변함이 없다. 자녀가 훈육을 엄마의 분노라고 느끼지 않도록 엄마의 감정의 높낮이의 표현에 전략적인 것이 필요해 보이는 지점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자녀가 사춘기에 들어선 이후에 더욱 필요한 것들이긴 하다.) 어떻게 가능해질까? '야누스'의 두 얼굴이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기 위함이라는 긍정적 의미의 은유적 해석은 현명한 마더링의 특성을 가진다. 엄마 스스로가 직면하고 있는 ‘현재’(ex. 아이와의 갈등상황, 당면한 문제에서 해결방안이 나로부터는 생길 수 없다고 느껴질 때)와 거리를 두고, 엄마 자신의 ‘과거’(나의 사춘기 시절, 또는 누군가가 나를 이해해주지 못해서 힘들었었던 때, 그냥 나 자신에게 무기력해졌었던 청소년기의 엄마)와 ‘미래’(ex. 자녀가 성인이 된 후, 10년 뒤의 내 삶 등)에 대해 생각해 보자. 숨 호흡을 두세 번 크게 하고, '거울'을 보자. (이왕이면, 정말 화가 날 때는 곱게 꾸민 모습으로 보기를 추천한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라고 혼잣말로 얘기해 보자. 결국,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현명한 마더링”의 출발점이다. 객관적으로 나와 자녀를 대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마치 엄마가 아이 앞에서 '전지전능한 신'인 듯한, '야누스'가 가지고 있다고 믿어졌던 '수호신'의 역할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스스로의 '역할론'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조망하려는 노력이 엄마의 감정을 제어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게 “교육의 목적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되기 위함이라고” 우리는 모두 어디서든 언제든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과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 기준을 잘 정할 수 있는 사람이 ‘리더’가 될 수 있고, 스스로의 삶을 주도적으로 개척해 나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엄마의 모든 마더링의 구체적인 행동의 기저에도 각자의 '교육/양육 철학'이 있다. 기업도 '경영철학'을 먼저세우고, 그에 걸맞은 목표와 가치로 구체화한 전술들을 만든다. 마찬가지로, 한 생명을 빛으로 자라게 돕는 엄마에게 교육 철학과 양육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한편, 감정적인 엄마는 아무리 좋은 철학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실행해 낼 수가 없다. 비록, 그 이유가 '그분들'이 제공한 것일지라도, 감정변화가 심하고 그로 인해 우왕좌왕하는 엄마의 일관성 없는 모습은 자녀에게 기준의 ‘모호성’만을 학습시킬 뿐이다. “감정적”이 아닌, “감성적”인 엄마가 되고자 노력해 보자. 이를 위해서는 엄마가 먼저 자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진 후에야 자녀에게 ‘감정'을 쏟아내지 않을 수 있다. 잠깐 내려놓고, 나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자녀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방향이 보일 것이다. 자녀에겐 엄마가 ‘야누스’다. 나의 자녀가 엄마인 나를 어떤 '야누스'로 규정할지는 오늘 나의 감정표현에서 결정되리라.



 

Unsplash의 chris liu





                     

이전 01화 '좀 더 해야만 해'라는 문화 속 마더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